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진동규
  • 승인 2014.08.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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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돛을 올려라 돛을 올려라
 
 비 갠 골짜기 는개가 바쁘다. 봉우리를 감싸 안고 세연정의 가락을 타는 것이리라.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 지은 정자다. 오십일 세에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가던 뱃길을 돌려 보길도에 은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주도를 목적하던 것이었는데 보길도의 상록수림이 어우러진 풍광에 그만 끌려버렸다는 것이다.

 세연정은 우리 시조의 아름다움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낸 <어부사시사>를 만들어낸 창작공간으로 유명하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본 시의 첫 행이다.

 버들 숲에 뻐꾸기 날아와 우는 아름다움을 눈여겨본 시인은 어디만큼 깊어지는 것인가. 버들 숲이 아름다운 자태를 꾸며 뻐꾸기를 불러오고 울음 울게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초록으로 물결을 치고 있는 푸르름은 뻐꾸기가 노래를 얹어서 아름다운 순간을 이루어 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뻐꾸기와 버들을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뻐꾸기와 버들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버들 숲이 우는 것인가. 뻐꾸기가 푸른 것인가” 시인은 여기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장단을 넣는 것이 아닌가.

 “안개가 자욱한 강과 겹겹이 둘러선 묏부리는 누가 그림으로 그렸겠는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저를 따르는가 제가 나를 따르는가”

 보길도라는 작은 섬에 무슨 강이 있겠는가. 자욱한 안갯속에 겹겹이 둘러선 묏부리들이 안갯속에 강을 흐르게 했을 터이다. 그림 같은 풍경 앞에 선 시인은 창조자이신 신을 끌어들이거나 자연의 섭리쯤으로 가볍게 넘겨버리는 일이 없다. 시인은 분명하게 말한다. 지금 눈앞에서 그림을 완성하는 작가는 무심한 듯한 저 갈매기이고 시인 자신이라고 밝히는 것이다.

 무심한 갈매기라니. 지금 그림으로 들어가면서 그림을 완성하고 있는 갈매기를 저만큼 띄워놓고 시인 자신과 동등한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자주 연락하지 않는 벗에게 “무심한 사람.” 한다고 해서 미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묻어나던가. 조금은 서운한 듯하지만 끈끈한 정인인 것을 감출 수 없지 않은가.

 시인의 우주관이고 생명관이다. 자욱한 안개가 묏봉우리들을 끌어 모으고 강을 놓는가 하면 그 현장에 있던 갈매기와 시인은 순간으로 생명의 환희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고산은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정치가의 정치답게 벼슬도 했지만 십오 년이라는 유배생활도 했다. 마지막 유배는 칠십사 세에 보길도와는 가장 먼 함경도까지 가서 팔십일 세까지 치렀다. 왕의 특명으로 풀려난 그는 <어부사시사>를 지은 세연정으로 돌아와 운명하였다.

 “한 조각 거룻배에다 실어놓는 것이 무엇인고” <어부사시사>의 한 구절이다. 우주관이며 생명관을 들먹여서 세연정의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말을 그토록 아름답게 다듬어 놓은 덕에 오는 나는 그와 동참하지 않는가. 시공을 초월하여 보길도의 안개와 세연정의 가락을 타지 않는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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