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Night Life] 4. 중국 청두시, 밤이 살아있다
[전주한옥마을 Night Life] 4. 중국 청두시, 밤이 살아있다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4.08.22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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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2월 유네스코는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를 전주시와 마찬가지로 ‘음식 창의도시(美食之都, 맛있는 음식의 도시)’로 선정했다. 청두시가 그동안 국제미식관광축제 등 다양한 국제규모의 미식행사를 벌여온 성과다. 청두시는 ‘맛’으로만 연간 수천만 명의 미식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경제적 규모만 무려 6조 원에 달한다. 요식업에 있어 세계적인 최강도시다. 지금도 쓰촨요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맛의 고장 전주’가 쓰촨성 청두시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쓰촨성 성청 소재지이자 ‘팬더의 도시’인 청두시는 인구 2,000만 명이 사는 대도시. 청두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2,300년 동안 하나의 성이름(城名)과 같은 장소(城址)를 유지 한 곳이다. 그러나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참사로 폐허가 됐지만 지금은 재도약했다. 더욱이 청두시는 역사문화의 고장인 전북과 마찬가지로 중국 전통역사가 잘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문화지로 유명하다.

 청두시는 삼국지(三國志)와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역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유비의 묘와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무후사’를 비롯해 중국 당대 최고 시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두보초당’, 그리고 전주 한옥마을과 유사한 당나라시대 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있는 ‘관잡골목’과 ‘금리거리’, 옛모습 그대로인 ‘안인민속마을’과 ‘펑리민속마을’ 등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전주한옥마을·오목대·경기전·어진박물관·풍남문·전라감영지·객사·동학농민혁명군 전주성 진입로 등 역사문화지가 전주시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청두시 역시 무후사·두보초당·탑사골공원 등 대부분의 역사문화지가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2,000만 청두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평소 이곳에서 선인들의 정신과 삶을 보아온 시민들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문화자긍심이 대단히 높은 게 특징이다.
 

 전통역사문화 전승도시 청두시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은 청두시에 대한 역사를 이렇게 말했다.

 청두는 중원의 후방이다. 한나라 시절의 청두는 인구 40만 명으로 전국 6대 도시였다. 왕조가 쇠락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갈량(諸葛亮)은 이곳 익주(益州)를 주목했다. 유비(劉備)를 보좌해 촉한(蜀漢)을 세웠다. 삼국정립의 판도를 만든 그는 중원 통일의 꿈을 여기서 키웠다. 청두시에는 지금도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 무후사(武侯祠)가 있다. 

 청두는 시인의 도시다. 당(唐)나라의 시선 이백은 청두에서 자랐다. 시성 두보는 현존하는 시 1,400여 수 가운데 800여 수를 청두에서 지었다. 그가 3년9개월간 머물던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송(宋)나라의 대문장가 소식(蘇軾)은 청두 남쪽 미산(眉山) 출신이다. 중원의 문화가 예(禮)를 중시하고, 현재의 후베이(湖北)성인 초(楚)의 문화가 무속을 중시한다면, 쓰촨성 청두는 신선(神仙)을 중시했다. 도교의 발상지 격인 청성산(靑城山)이 청두에서 멀지 않다. 불교의 성산 아미산(峨眉山) 인근서 태어난 소식은 도교와 불교를 아울렀다. 청두의 자연과 문화가 소동파의 명문을 만든 것이다.

 청두는 이민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로 넘어가던 시절 장헌충(張獻忠)이 군대를 이끌고 청두에 들어왔다. 황제를 자칭한 그는 국호를 대서(大西), 청두를 서경(西京)으로 정한 뒤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곧이어 청의 만주족 군대가 몰려 들어왔다. 계속된 전란과 전염병, 기근으로 쓰촨의 인구는 급속히 줄었다. 청나라가 안정되자 이민의 물결이 쓰촨을 뒤덮었다.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란 말이 있다. 후난(湖南)·후베이·광둥(廣東)·광시(廣西)의 백성들이 쓰촨을 채웠다는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1685년 9만 명에 불과하던 쓰촨의 인구가 불과 30년 만에 949만 명으로 폭증했다. 새로운 쓰촨, 새로운 청두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맛으로 세계의 중심에 서다

▲ 중국 쓰촨요리의 대표격인 훠궈
 전주시가 ‘한정식’과 ‘전주비빔밥’으로 한국의 맛 중심도시가 된 것처럼 청두시가 세계 맛의 중심에 선 것은 ‘쓰촨요리’ 때문이다. 우리에겐 ‘사천요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쓰촨 요리인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火鍋)’. 붉은 고추기름이 둥둥 뜬 솥에 각종 고기와 야채를 데쳐먹는 맛이 일품이다.

 입안이 얼얼하게 매운 쓰촨 요리 훠궈는 중국음식의 대명사격이다. 쓰촨 요리는 맵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고추를 ‘라자오(辣椒)’라고 부른다. 16세기 후반에야 중국에 전해졌다. 처음 들어온 곳은 해안의 저장(浙江)성이었다. 강남의 신선한 요리에 고추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륙인 후난성에 전해진 뒤에 인기를 끌었다. 고추의 사투리 ‘하이자오(海椒)’는 이렇게 생겼다. 대이민의 물결과 함께 고추가 쓰촨으로 들어왔다. 이민자들에게는 험난한 여정과 농지 개간의 어려움을 견딜 자극제가 필요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마라(麻辣)’가 쓰촨 요리의 대명사가 된 연유다. 

 쓰촨 총독 정보정(丁寶楨)은 궁바오지딩(宮保鷄丁)이란 중국의 기본 요리를 만들었다.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쓰촨에 부임한 고관대작들은 쓰촨 요리를 한층 더 풍부하게 했다. 1861년 만주족 관정흥(關正興)은 청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흥원(正興園)이란 식당을 열었다. 정흥원은 쓰촨 스타일을 접목한 만한전석 요리로 유명했다. 특히 정흥원은 쓰촨 요리사들의 요람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정흥원은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각자 독립해 식당을 열었다. 쓰촨 요리는 20세기 초 중화요리의 최고봉으로 굴기했다. 

 훠궈는 20세기 초 전까지는 하급노동자 쿠리(苦力)들의 먹을거리였다. 이후 훠궈는 고관대작을 비롯해 전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됐다. 지금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보급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밤에도 발길 끊이질 않아

▲ 청두시 관잡골목에서 밤에 설탕물로 공작을 만들어내고 있는 공예가
 청두시 한복판 아파트속에 자리한 구도심권 ‘관잡골목’은 낮이나 밤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전주한옥마을이 항일정신의 발로로 조성된 한옥 집단거주지역처럼 관잡골목은 당나라시대의 고건축주거지역으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시대 차이는 있지만 옛 거주지역의 모습을 도심 한복판에 간직하고 있는 역사지다. 하지만 두 곳의 차이점은 밤에 나타난다. 낮에 북적이던 전주한옥마을은 어둠이 되면 어둠이 깔린다. 반면, 청두시 관잡골목은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는 청두시의 야간관광콘텐츠 개발 노력의 결과다.

▲ 관잡골목에 청두시에서 제작 운영하고 있는 부스 상인과 관광객들
 청두시 도심 한복판에 방치되어 있던 이곳은 문화예술인이 저렴한 거주비용으로 찾아들었다. 창작활동과 전시판매를 하기 시작하자 동료 예술인들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들자 청두시가 도시재생 차원에서 행정력을 앞세워 관잡골목 개발에 나섰다. 아파트촌 가운데 위치한 관잡골목을 청두시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지원과 야간관광상품으로 개발했다. 골목 담벼락에 작품을 걸어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감상토록 배려했다. 또 시에서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부스(일명 포장마차)를 제작해 상인들에게 공급했다. 부스들을 관잡골목 사이에 고정, 운영토록 했다. 이 부스는 낮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운영된다. 부스는 쓰촨요리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음식, 악세사리, 공예품, 가내수공예품 등 다양한 상품을 전시, 판매한다.

▲ 길걱리음식들
 청두시 시민들은 밤에 이곳으로 산책을 나온다. 관광객들은 밤문화를 즐기기 위해 찾는다. 중국문화를 체험하면서 다양한 쓰촨요리와 길거리음식, 전통공예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볼거리, 먹거리 등이 풍부한 관잡골목은 청두시 관광상품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단, 밤에는 확성기를 사용하는 거리공연은 축제기간을 제외한 일상에서는 자제시키고 있다. 지역주민의 주거안정권을 보장하기 위함에서다. 

 글·사진=쓰촨성 청두시 한성천 기자

 <자문위원> ▲배기철 전주기전대 교수, ▲권대환 전주시정발전연구소 연구원, ▲신진호 스페인 BCN solutio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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