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성청 소재지이자 ‘팬더의 도시’인 청두시는 인구 2,000만 명이 사는 대도시. 청두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2,300년 동안 하나의 성이름(城名)과 같은 장소(城址)를 유지 한 곳이다. 그러나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참사로 폐허가 됐지만 지금은 재도약했다. 더욱이 청두시는 역사문화의 고장인 전북과 마찬가지로 중국 전통역사가 잘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문화지로 유명하다.
청두시는 삼국지(三國志)와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역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유비의 묘와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무후사’를 비롯해 중국 당대 최고 시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두보초당’, 그리고 전주 한옥마을과 유사한 당나라시대 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있는 ‘관잡골목’과 ‘금리거리’, 옛모습 그대로인 ‘안인민속마을’과 ‘펑리민속마을’ 등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전주한옥마을·오목대·경기전·어진박물관·풍남문·전라감영지·객사·동학농민혁명군 전주성 진입로 등 역사문화지가 전주시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청두시 역시 무후사·두보초당·탑사골공원 등 대부분의 역사문화지가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2,000만 청두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평소 이곳에서 선인들의 정신과 삶을 보아온 시민들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문화자긍심이 대단히 높은 게 특징이다.
전통역사문화 전승도시 청두시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은 청두시에 대한 역사를 이렇게 말했다.
청두는 시인의 도시다. 당(唐)나라의 시선 이백은 청두에서 자랐다. 시성 두보는 현존하는 시 1,400여 수 가운데 800여 수를 청두에서 지었다. 그가 3년9개월간 머물던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송(宋)나라의 대문장가 소식(蘇軾)은 청두 남쪽 미산(眉山) 출신이다. 중원의 문화가 예(禮)를 중시하고, 현재의 후베이(湖北)성인 초(楚)의 문화가 무속을 중시한다면, 쓰촨성 청두는 신선(神仙)을 중시했다. 도교의 발상지 격인 청성산(靑城山)이 청두에서 멀지 않다. 불교의 성산 아미산(峨眉山) 인근서 태어난 소식은 도교와 불교를 아울렀다. 청두의 자연과 문화가 소동파의 명문을 만든 것이다.
청두는 이민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로 넘어가던 시절 장헌충(張獻忠)이 군대를 이끌고 청두에 들어왔다. 황제를 자칭한 그는 국호를 대서(大西), 청두를 서경(西京)으로 정한 뒤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수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곧이어 청의 만주족 군대가 몰려 들어왔다. 계속된 전란과 전염병, 기근으로 쓰촨의 인구는 급속히 줄었다. 청나라가 안정되자 이민의 물결이 쓰촨을 뒤덮었다.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란 말이 있다. 후난(湖南)·후베이·광둥(廣東)·광시(廣西)의 백성들이 쓰촨을 채웠다는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1685년 9만 명에 불과하던 쓰촨의 인구가 불과 30년 만에 949만 명으로 폭증했다. 새로운 쓰촨, 새로운 청두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맛으로 세계의 중심에 서다
입안이 얼얼하게 매운 쓰촨 요리 훠궈는 중국음식의 대명사격이다. 쓰촨 요리는 맵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고추를 ‘라자오(辣椒)’라고 부른다. 16세기 후반에야 중국에 전해졌다. 처음 들어온 곳은 해안의 저장(浙江)성이었다. 강남의 신선한 요리에 고추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륙인 후난성에 전해진 뒤에 인기를 끌었다. 고추의 사투리 ‘하이자오(海椒)’는 이렇게 생겼다. 대이민의 물결과 함께 고추가 쓰촨으로 들어왔다. 이민자들에게는 험난한 여정과 농지 개간의 어려움을 견딜 자극제가 필요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마라(麻辣)’가 쓰촨 요리의 대명사가 된 연유다.
쓰촨 총독 정보정(丁寶楨)은 궁바오지딩(宮保鷄丁)이란 중국의 기본 요리를 만들었다.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쓰촨에 부임한 고관대작들은 쓰촨 요리를 한층 더 풍부하게 했다. 1861년 만주족 관정흥(關正興)은 청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흥원(正興園)이란 식당을 열었다. 정흥원은 쓰촨 스타일을 접목한 만한전석 요리로 유명했다. 특히 정흥원은 쓰촨 요리사들의 요람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정흥원은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각자 독립해 식당을 열었다. 쓰촨 요리는 20세기 초 중화요리의 최고봉으로 굴기했다.
훠궈는 20세기 초 전까지는 하급노동자 쿠리(苦力)들의 먹을거리였다. 이후 훠궈는 고관대작을 비롯해 전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됐다. 지금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보급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밤에도 발길 끊이질 않아
글·사진=쓰촨성 청두시 한성천 기자
<자문위원> ▲배기철 전주기전대 교수, ▲권대환 전주시정발전연구소 연구원, ▲신진호 스페인 BCN solutio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