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레옹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 김효정
  • 승인 2014.08.18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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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소설관람 21.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각자의 ‘최근’이 모두 다를 것이고(어쩌면 몇 년 전), 또 이런저런 이유로 책 한권 읽는 것이 하나의 ‘일’이 되어 버린데다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최신기기들이 널려 있는 현대사회에서 독서마저도 대신해 주는 스마트폰 앱들도 부지기수다.

 프랑스 작가 레몽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는 독서라는 행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관계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이 소설에는 스마트폰 앱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책 읽어주는 일을 업으로 삼은 마리 콩스탕스가 등장한다. (물론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도 한 몫 하지만)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서른 네 살의 마리 콩스탕스는 어느 날 직업이 갖고 싶어졌다. 고민 끝에 그녀가 생각해 낸 직업은 책 읽어주기. 결국 ‘책을 읽어드립니다’라는 신문 광고를 내게 되고, 반신반의하던 그녀에게 드디어 첫 고객이 연락을 해 온다.

 하반신불구의 장애아와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있는 퇴락한 장군 부인, 엄마가 늘 바쁜 어린 여자아이, 기업체 사장, 노법관 등 다양한 인물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그녀는 단순히 책을 읽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그녀는 고객이 된 사람들을 위해 적정한 수준의 책을 고르고, 읽어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인간들의 이면과 특히 결말부분에 가서 사드의 소돔 120일이 등장하면서 부터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철저한 본능적 욕망이 작용한다.

 <책 읽어주는 여자>는 책읽기를 통한 소통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독서’는 그 안에 담긴 활자를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주변의 인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말하고 듣기’ 그 이상으로 서로 간에 교감이 이뤄질 때 비로소 온전한 ‘독서’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책을 읽어주기 위해 찾아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결핍된 인간들이다. 하반신 불구의 예민한 소년 에릭, 백내장 때문에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는 헝가리 귀족 출신의 장군 부인, 바쁜 엄마를 둔 8살짜리 소녀. 그러나 이 결핍의 대상들이 마리가 읽어주는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책의 내용과 지식은 아니다.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혹은 때로는 연인처럼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길 바란다.

 하지만 삶은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모든 일이 내 맘 같기만 하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마리의 의도와 달리 처음 그녀가 신문에 광고를 낸다고 했을 때 반대하던 신문사 광고 담당자의 말처럼 ‘엉뚱하고 골치 아픈 일’이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하면서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서의 직업적 위신은 점점 떨어지고 그녀는 난처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솔직하고, 유머스러우면서도 에로티시즘을 자유롭게 오가는 이 작품은 ‘책’이라는 사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저자의 생각이나 상상의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닌 그 안에 담긴 텍스트들이 개개인의 독자와 만나면서 각각의 새로운 의미들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12회 몬트리올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원작과 함께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마리 콩스탕스를 마리라는 소설 안 인물(내부액자)과 콩스탕스라는 소설 밖 인물(외부액자)로 구분하면서 몇 겹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프랑스 영화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여주인공 마리, 그리고 그녀의 ‘고객’들의 이야기가 음악처럼 경쾌하게 흐르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다양한 인물들과 만날 수 있는 창구이자 소통의 길이다. 입추가 지나니 가을이 서둘러 온 듯한 요즘, 책장에 묵혀 놓았던 먼지라도 털어낼 심상으로 책 한권 꺼내 첫 장을 넘겨 보면 어떨까. 시작이 반이다.

 김효정<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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