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광복!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 조금숙
  • 승인 2014.08.1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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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는 탕에 나뒹굴고 소위 일장기가 나부끼게 되었다. 그리고 곧 세금고지서가 날아왔고 토지조사에다 심지어 개, 돼지, 닭까지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엄청난 약탈 강간행위까지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경상북도 영천의 한 마을에 의병 토벌대가 들이닥치더니 여자와 남자의 옷을 벗겨 나체로 둘씩 나무에 매달아 놓고 희롱하였다. 8월 29일 경술국치란 일장기 세금 토지조사 그리고 양민 겁탈 조선인 노예취급이었으니 분하고 억울하다는 말을 어찌 다 다 쏟아낼 것인가?

 백암 박은식(현 박유철 광복회장 조부)은 당신의 명저 ‘한국 통사’에서 “일제는 우리나라에 쇳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빼앗아 갔다”고 고발한 바 있는데 사실은 종잇조각 책 한 권 남기지 않고 빼앗아 갔다. 그리고 그 책들이 남산 왜성대 뒤뜰에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불타고 있었다. 조선 말살행위였다 참으로 상상을 초월한 야만적인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 했던 것이다.

 진시황도 무색하다 할 정도로 이 나라 이 민족을 잔인무도하게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1911년 망국의 첫해에 검은 태양이 떠오르자 온천지는 칠흑속에 잠기고 말았고 3월 서울 종묘의 제사가 끊기자 때아닌 폭풍이 불고 폭우와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도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해 하고 슬퍼한 것이다. 이때 황제 부자가 일본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 돌았던 것이다. 사실은 덕수궁과 창덕궁에 유폐되어 그들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으니 황제가 일본에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잉금님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궁성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유행가 가사처럼 황성 옛터가 된 것이다.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고 나라 잃은 잉금님을 한없이 애처로워 했다. 그래서 그들은 李太王 이니 李王 이니 하는 일제가 붙여준 이름을 부르기를 거부한 것이다.

 교활한 일본은 이때 한국민의 이러한 울분을‘은사금’이라는 돈과 ‘작위’라는 명예 그리고 일본 관광이라는 눈요기로 민심을 달래려 했다. 터무니없고 어림없는 낚싯밥에 지금의 친일인사들은 하염없이 유혹에 넘어갔다. 그들은 그때 은사금으로 3천원의 공채를 모집하여 그 돈으로 친일파 3천559명 양반·유생 9천8백11명.효자 절부 3천200명, 과부 홀아비 7만92명에게 공수표를 마구 난발하기도 했다. 이 공채의 최종 납세자는 한국민이었으니 결국 일제는 뻔뻔스럽게 남의 돈으로 선심을 쓴 것이며 받은 사람은 공수표를 손에 쥐고 하염없이 일본의 거짓 수작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이것을 공표지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도 이때 이 은사금을 한없이 거부한 애국지사가 많았고 심지어 유생 선비학자들은“기품이 있는 학은 더러운 명분 없는 먹이를 탐 하지 않는다”는 공고문까지 써 붙였고 그 돈을 받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다는 애국혼의 기백을 표하니 일경이 이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제는 공수표 난발 작위와 관광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유혹했지만 다른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단발령이라는 사대부 양반가 선비들의 상투를 자르고 한국인의 전통의상인 의관을 벗어던지게 하였다.

 더욱 간교한 수법으로 한국인 면장을 앞장세워 민족 상호간의 불신과 이간질만 오가는 실정이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어찌 이 뿐이겠는가 105인의 사건을 날조하여 600명이 넘는 애국지사들을 감옥에 넣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준공식에 참석차 신의주로 가는데 선천역에서 안명근의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을 기회로 데라우치는 신민회 간부들이 암살계획을 꾸몄다고 터무니없는 보복을 가하였는데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신민회의 간부들을 다 잡아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여 모두 불구가 되는 악형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한필호, 김근영은 고문에 못 이겨 결국 사망하고 105인은 기소하였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었다.

 “나라가 망했다. 간도로 가자”1912년 임자년(壬子年)이 밝아왔다. 국민이 약속이나 한 것 처럼 훌훌 털고 멀고도 먼 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1910년 간도의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1918년에는 무려 60만으로 급증한 것이다. 불과 8.9년 사이에 50만 명이 간도로 떠난 것이다. 이 시기의 간도 이주는 민족 대 이동이었다고 해야 옳은 말이다. 이렇듯 민족의 대이동은 간도가 약속의 땅이라는 헛소문이 나 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간도는 고난의 땅 황무지였다. 사랑하는 고국땅을 두고 뱀과 진혜가 우글거리는 간도 땅으로 떠나가는 행렬이 신작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러한 광경을 지금의 젊은 세대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것인가? 우리의 선조들은 이렇게 고난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거지가 되어 다시 돌아온 사람, 연변조선족 동포들을 보라 그들의 대다수는 두만강을 건너간 농민들의 후손들이다 1912년 간도 이주는 일종의 열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일제에 빼앗긴 들녘 무단통치 억울한 죽음 이렇게 희생되어 얻어진 광복! 69주년, 가슴에 새겨 기억해야 할 뼈아픈 경축일이다.

 조금숙<광복회 전라북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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