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꽃 나라꽃
우리 꽃 나라꽃
  • 김효순
  • 승인 2014.07.31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다. 1990년대 중반, 당시 국제화 바람을 타고 처음으로 교육부에서 영어교사 해외어학연수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자비이든 교육청 지원이든 영어교사라면 누구나 어학연수 한두 번은 다녀왔지만, 그때는 외국 한 번 나가보지 못한 영어교사들이 수두룩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름의 긴장 속에 선발시험을 치렀고, 운 좋게 난생처음으로 해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홈스테이로 6주간 낯선 나라에서 영어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영어교사라는 자존심 때문에 초조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드디어 호주 브리즈번에 도착하던 날, 공항을 빠져나와 퀸즐랜드대학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처음 그 꽃을 보았다. 노란 꽃송이가 망울망울 달린 아름드리나무가 숲을 이루면서 끝없이 이어졌다. 광활한 푸른 대자연과 함께 무척 이국적이었다. 시내로 들어오니 가로수도, 주택 담장도, 대학 캠퍼스 곳곳에도 온통 그 나무였다. 얼핏 보면 아카시아와 비슷하지만. 더 작고 도톰한 초록 잎 사이로 말미잘 촉수처럼 기다란 노란 꽃들이 나풀거렸다. 멀리서 보면 나무에 황금알이 매달려 있는 듯 환상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꽃 이름은 ‘골든 와틀(golden wattle)‘이라는 호주의 국화(國花)였다. 그러고 보니 연수반 이름이 초록(green)반과 노랑(yellow)반이었다. 대학건물 외벽도, 안내표지도, 학교 버스 노선도 초록과 노랑으로 구별했다. 운동선수의 유니폼부터 초중등학교 교복도 초록과 노랑으로 디자인했다. 놀라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은 부분까지 호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나라꽃 사랑이 충격 반 부러움 반으로 다가왔다.

 머나먼 그곳에서 불현듯 우리 꽃, 무궁화가 생각났다. 고백건대, 무궁화 꽃이나 잎 모양새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어렸을 적 숨바꼭질할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수없이 외쳤고,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정작 무궁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무궁화’하면 생각나는 몇몇 단편적인 기억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 집무실, 국회의원 배지와 훈장에 그려진 무궁화 문양, 무궁화 몇 개짜리 호텔, 무궁화호 열차, 무궁화호 인공위성……. 그러고 보니 국가와 권력, 명예와 부 그리고 영광의 최고 정점에 무궁화가 있었다. 나라꽃이니 당연하겠지만, 바로 그런 고귀함과 근엄함 때문에 무궁화는 친근감보다는 오히려 편안하지 않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그 뒤로 오랫동안 무궁화는 나에게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랬던 무궁화가 어느 날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답답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봉실산 자락으로 옮겨온 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던 밤이 지나고 맑게 갠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서 그 꽃을 보았다. 푸른 들판을 등지고 작달막한 나무에서 하얗고 발그레한 무궁화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아니, 봉동읍에서 전주 외곽까지 20리 길 남짓한 도로 양쪽으로 빼곡히 무궁화 길이었다.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싱그러움과 건강함이 넘쳐 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이었다. 분홍색 무궁화는 봄이 오면 이산저산에 피어나는 진달래를 보는 듯 반가웠고, 하얀색 무궁화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저고리를 보는 듯 애잔했다. 일부러 무궁화를 가로수로 심고 가꾸었을 누군가에게 감사드리며, 그해 여름 내내 출근길이 행복했다.

 원래 무궁화는 7월부터 10월까지 무수히 피고 지기 때문에 이름을 무궁화(無窮花)라 부르고, 강한 생명력과 은근함, 끈기가 역사적으로 수없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살아남은 우리 민족과 같다 하여 국화(國花)로 정했다고 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꽃잎을 오므리고 다음날은 통째로 떨어지면서 생명을 다한다고 한다. 그래도 무더기로 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10년 정도 자란 무궁화 한그루에서 매일 아침 20~30송이씩 새롭게 피기 때문이라 한다.

 이제 8월이다. 바야흐로 무궁화의 계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무궁화가 활짝 핀 출근길을 달리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전국의 고속도로가 무궁화 꽃길이라면, 도심 곳곳에 무궁화 숲이 있다면, 집집마다 무궁화 울타리가 있고, 학교마다 무궁화동산이 있다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말 그대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될 것이고, 저절로 나라꽃 사랑이 깊어지지 않을까. 그 옛날 낯선 땅 호주에서 그들의 나라꽃 사랑을 보면서 받았던 충격과 부러움을 추억하면서 오늘 아침도 기분 좋게 무궁화 꽃길을 달린다.

 김효순<전주영어체험학습센터 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