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에는 동정이 없다
잔치에는 동정이 없다
  • 이동희
  • 승인 2014.07.2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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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자 작가요 외교관이었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889~1957.칠레)은 1945년 남미대륙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평생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스무 살 때 첫사랑 로멜리오 우레타가 자살로 그녀 곁을 떠났다. 그녀 나이 54세 때는 친아들처럼 사랑했던 조카이자 양자였던 후안 미겔이 역시 자살로 그녀를 하직했다. 그녀의 시집 <죽음의 소네트> <비탄> <애정> 등은 이런 아픔이 녹아든 삶의 반영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이란 글은 예술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이를테면 제3계명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라.”는 지적은 예술적 진실이나 문학적 가치 정서는 깊이 있는 사유와 결합할 때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10계명에는 이런 구절도 보인다.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라며 끊임없이 겸손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십계명 모두가 구구절절이 공감을 자아내지만, 필자에겐 특히 제5계명에 감명이 크다.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에는 동정성이 모자라 있기 때문이다.” 이는 화려하고 즐거운 세상의 잔치마당은 예술이 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제7계명에 있다.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릴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즉 예술의 궁극적인 주제가 바로 ‘자비-휴머니즘’에 닿아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바로 아름다움[예술미]이며 그 정신 상태는 시정신을 지향한다. 시정신은 무엇에 봉사하지도 않고 무엇에 굴종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정상에 서 있으려는 힘이자 스스로 하류를 지향하는 힘이면서, 가득 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고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모든 예술은 시정신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래서 시정신이 결여된 예술[아름다움]은 예술도 아닌 것이다.

 전투[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인들에게서 자비로운 지혜를 발견하기란 동아줄을 바늘구멍에 넣기보다 어렵다. 승리감에 도취한 사람들은 전투에서 거둔 노획물을 나누거나 훈장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잔치에는 동정이 없다’고 했다. 동정은 ‘童貞(동정)’이면서 ‘同情(동정)’이다. 순결성도 없지만, 타인에 대한 인정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너의 작품을 잔치에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누가 정치인들이 벌이는 승리의 잔치에 [예술]작품을 가지고 간단 말인가.

 예술가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을 본다. 예술가도 (사회 생활하는)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예술작품으로 잔치(선거판)에 공헌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미 (창조하는 작가로서)예술가는 아니다. 예술로 얻은 명성으로 잔치(정치)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은 동정이 없는 곳에서 동정을 가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시인 미스트랄이 ‘아름다움은 동정’이라고 역설하지 않는가? 순수성과 인정이 없는 곳에서 예술미[동정]를 찾는 일 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무엇이겠는가?

 ‘관피아, 학피아, 법피아’ 등 신조어들이 세태를 반영한다. 국민이 주는 봉록을 받고,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할 공복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폭력적 이권세력과 손을 잡고 부리는 행태가 국가·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그래서 생긴 새로운 유행어를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함을 넘어 깊은 절망에 이르고 있다.

 이제 ‘관피아’만이 문제가 아니다. 학계의 마피아-‘학피아’의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된 대학가-학계를 일컫는 학피아(박노자「학피아, 학살의 종범들」『한겨레』14.6.11)들이 가진 자들의 권력을 지켜주는 일에 봉사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 더하여 예술행정까지 ‘예피아’가 등장하지 말란 법 없다. 예술적 순수성도, 시정신에 입각한 정열도 없는 관변예술가[예피아]들에 의해 농단되는 예술행정을 용납할 수 없다. 지자체 선거에서 승리하여 지역사회의 살림을 꾸려갈 단체장들이 명심할 일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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