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의 ‘농담’
밀란쿤데라의 ‘농담’
  • 김효정
  • 승인 2014.07.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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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의 명랑한 소설관람 16.

 우리의 삶은 때때로 농담 같은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저 농담이라면 허허 웃어 넘기면 그만이겠지만 인생이 또 어디 그러한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이 농담처럼 시작한 일이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의 회오리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 그 이야기 속 주인공 루드빅의 삶도 그러한 농담의 굴레에서 허우적대고 만다.

 1940년대 후반 체코의 공산혁명직후, 모든 것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띄며 강요되어지던 시기 에 루드빅은 그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저 시대적 상황에 흡수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였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연애하고 싶은 여자 마르게타는 공산당 여름캠프에만 열을 올리고 그런 그녀를 놀려줘야겠다고 생각해 농담처럼 보낸 연서한통이 덜컥 재판에 회부되면서 그는 반역자로 지목되고 순식간에 인생의 항로가 뒤바뀌게 된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들이 그를 배신하고 스스로가 잔인한 농담의 대상이 되어 버린 웃지 못 할 상황. 결국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15년후, 루드빅은 자유로워졌고 15년전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녀와 그들에게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계획했던 복수는 계속해서 희극적으로 어긋나고, 결국 삶 자체가 농담이며 우리는 그 농담 속에서 살아가야함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오늘도 곧 미래의 과거 일뿐이라는 필연적인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루드빅은 15년이 걸렸다. 과연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농담처럼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965년 탈고한 소설 <농담>은 실상 그의 조국 체코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 작품이 동유럽 체제의 스탈린주의를 비판적으로 파헤친다는 내부 비판에 시달렸던 밀란 쿤데라는 고국 체코에서 추방당하고 이후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리고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밀란 쿤데라는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어찌보면 <농담> 속 루드빅은 작가 자신의 모습과도 무척 닮아있는 듯하다. 모국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로 세상과 조우해야 하는 그의 처지는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농담과도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농담>의 영화화를 위해 밀란 쿤데라는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는데 영화는 작품의 내용과 그를 둘러싼 시대였던 1968년 자유체코와 이후 소련침공 등을 담아냈고, 1969년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를 비롯한 국제무대에서도 주목 받았다.

 그리고 지금, 밀란 쿤데라가 14년 만에 신작 장편 ‘무의미의 축제’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작품은 몸 한가운데 구멍으로 존재하는 배꼽을 탐구하며 농담과 거짓말, 의미와 무의미, 일상과 축제의 경계에서 삶과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 한 해외 서평 사이트에서 ‘남녀 간 관계를 솜씨 좋은 외과 의사처럼 분석해낸다’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또 다른 농담은 과연 어떨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농담 같은 삶이라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했다는데 그는 고국을 떠날 수 밖에 없을지언정 우리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는가. 세상이 나에게 던진 농담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을 때 행복도 찾아오는 법, 농담에 대처하는 나만의 자세가 필요하다.

 김효정<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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