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유물을 통한 발견의 기쁨
작은 유물을 통한 발견의 기쁨
  • 유병하
  • 승인 2014.06.1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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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마총(天馬塚)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을 발굴한지 41년 만에 신라무덤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을 대량으로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에 알려졌던 천마도(天馬圖) 이외에 새로운 천마도 한 장을 추가로 공개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고 있다. 이 외에도 화려한 금관과 유리그릇, 금·은제의 용기(容器)와 마구(馬具), 무기(武器)가 전시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아마도 관람객들은 천마총에 부장(副葬)되었던 유물 수량의 방대함과 함께 화려함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작지만 많은 비밀을 담고 있는 유물이 많이 있다. 예컨대 유리제 구슬과 목제 남근(男根)이 그러하다. 비록 박물관의 전시장 한 구석에 볼품없이 놓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천마도 및 금관(金冠)만큼이나 많은 비밀을 담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고대인(古代人)의 실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보다 생동감이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고대사회를 여는 열쇠’ 혹은 ‘수수께끼의 신비 유물’로 불러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먼저 유리구슬을 살펴보자. 사실 유리제 구슬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신라 이전에도 많이 제작되었다. 한반도 곳곳에서 유리액을 부어서 구슬을 만들던 석·토제 틀[鎔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斯盧國)이 발전하던 경주와 울산, 포항 근처의 각종 유적에서 실물의 유리제 구슬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제작 전통을 이어받아 5~6세기의 신라에서도 둥근 구슬을 조합(組合)하여 팔찌와 목걸이, 가슴걸이, 귀걸이 등의 용도로 무덤에 부장하였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유리제 구슬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미추왕릉 C지구에서 발굴된 작은 목걸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었다. 여기에는 이미 익숙한 푸른 빛깔의 둥근 유리제 구슬 이외에 이국적인 얼굴이 그려진 구슬도 같이 목걸이에 꿰어져 있었다. 이른바 ‘인면옥(人面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구슬은 신라에서 오랜 전통 속에서 만들어오던 구슬과는 제작기법이 전혀 다른 구슬이었다. 예컨대 색깔이 다른 유리봉 여러 개를 녹여서 단면을 잘랐을 때 얼굴모양이 되게 조합하고, 잘라낸 개개의 조각들을 다시 구슬의 표면에 열기를 가하면서 모자이크처럼 붙인 후 마감한 것이다. 기존의 평범한 구슬에 비해서 많은 공력과 정성이 요구되는 한층 발전된 형태의 구슬이었다.

이 구슬은 이미 밝혀진 바대로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된 것임이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고대의 신라문화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주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신라문화는 삼연(三燕) 및 고구려와 같은 북방문화(北方文化)의 영향 하에 성립된 것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었다. 하지만 경주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견된 작은 구슬 하나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남아시아지역과의 문화적 교류가 5~6세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즉 신라문화의 복잡성 내지는 다면성(多面性)을 새롭게 부각시켜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75·1976년 경주 안압지를 발굴할 때 연못 바닥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와 금속유물, 목제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에는 기존에 축적된 지식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유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목제 남근(男根)이었다. 이 유물은 약간 과장된 18cm 가량의 크기에 남성 성기(性器)의 실물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은 안압지가 신라 궁성(宮城)의 일부임을 감안하여 남자의 주거가 제한된 왕궁 내의 여인들이 사용한 성인용품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경주시내의 왕경지구(王京地區)에서도 출토사례가 증가하였고, 남근이 강조된 고신라(古新羅) 토우(土偶)와도 연계되어 설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리고 신라 이외의 지역인 부여 능산리, 궁남지 유적에서도 발견되어 남근이 백제의 경우에도 의미있는 유물로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사례의 축적을 통해서, 지금은 농업생산과 인구생산의 증대를 기원하던 신라와 백제에서 신(神)에게 바치는 대표적인 공헌용(貢獻用) 물품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와 병행하던 당(唐)과 일본, 발해의 경우에도 나무나 돌을 깎거나 흙으로 빚은 남근이 신앙 물품으로 보고된 사례가 다수 확인되었다. 따라서 남근은 적어도 8~10세기의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고대신앙의 물품으로 폭넓게 사용되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 때문인지 한반도 내에서 오랫동안 전통이 지속되어 조선시대 병영 내의 사당(祠堂)과 현대의 강화도, 동해, 고성의 해신당(海神堂)에서도 여전히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작지만 많은 비밀을 담고 있는 유물들이 의외로 많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유물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단지 확인해 주는데 그친다. 그러나 작은 유물을 통해서 알게 된 새로운 비밀은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야말로 ‘발견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위에 오래 전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과 만나볼 수 있고, 다시 그들의 존재를 1,00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게 되면, 작은 유물도 유심히 살펴보고 설명 자료를 한 자라도 더 챙겨 읽으면서 기꺼이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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