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생각나는 이 사람을 아시나요?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이 사람을 아시나요?
  • 조금숙
  • 승인 2014.06.11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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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다.” 전 북파 공작원 백봉의 목사!

 백봉의 목사는 북파공작원이 되어 국가를 위해 싸웠지만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전혀 다른사람으로 40여 년의 무정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백봉의 목사의 인생 이야기를 펼치고자 합니다.

 필자는 영화 ‘실미도’를 봤습니다. 이 영화는 북파공작을 목적으로 군 특공대원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울에 잠입했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지만 과장된 부분이 많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면죄부를 판매하듯 전과자들에게 면죄 조건을 제시하며 북파공작원이 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북파공작원에 지원했던 사람들은 전과자가 아니라 그저 돈이 그리워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선량하고도 평범한 잠재적 애국자 소시민들이었습니다.

 백봉의 목사도 그중에 한사람, 전남 나주가 고향이며 부모님도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엘리트였는데요. 일찍 어머님을 잃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치과기공사 자격시험에 합격 후 생업에 매진하다 보니 고향집과 연락을 끊고 지내는 과정에서 영장을 못 받아 기피자로 몰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생업을 위해 자격시험에 응시하려고 타인의 양자로 들어가 ‘윤준식’이라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어느 날 서울역에서 북파공작원 모집 책임자를 만난 것이 운명적 인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사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 모집책의 내건 조건이 너무 그럴듯하고 첫째 기피자 생활의 병역문제가 해결된다는 바람에 당장 입대를 결심하게 됩니다. 사실상 가난했던 6-70년대 월남전도 갈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면 백 목사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실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던 백봉의목사! 비록 동기는 가난의 돈 때문이었을 지라도 그에 잠재적 애국심의 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수차례 북한을 잠입한 공로는“충무무공수훈”이 백목사의 가슴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우리 보훈 가족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 2003년 16대 국회에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이 통과 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날아갈 듯 환희에 찬 기분으로 백 목사는 서류준비를 위해 고향을 찾았건만 백봉의 목사가 받아본 것은“1984년 백봉의 사망”이라는 서류였습니다 백봉의는 40여 년 전 죽고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

 숨어서 살아온 인생 40년! 처절하고도 기막힌 사연의 화제의 인물이 지금 우리 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 목사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애국심이 있는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나 범죄자로 취급받는 게 억울하고 괴롭다는 거죠. 백목사의 가슴에 휘장은 6.25 이후 전북에서는 단 두 사람 또 한 분은 “충무무공수훈” 전라북도 지부장입니다.

 북쪽에서 살아 돌아오려면 그만큼 강도 높은 산악훈련과 상상을 초월한 사생결단 전력투구의 혹독한 훈련에 이미 청력을 잃어 보청기로 의지하며 인생 모두를 잃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지 목사로서의 목회활동 종교의 가르침대로 사랑·봉사·섬김·겸손의 최상 최고의 가치와 덕목을 한몸에 담고 현 사회에서 순기능의 보람찬 실천을 거듭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에게 총을 맞아 왼팔을 관통해 지금도 신경이 되살아나지 않아 팔이 하나 쓸모 없어졌어도 한손으로 운전하고 동양란을 대량으로 재배하여 판매도, 증정도 하며 고고한 난처럼 기품이 넘치는 생활을 하는 백봉의 목사! 그 따스하고 인정스러움과 훈훈함이 “특수공작원”이라는 주된 임무를 했던 사람 하고는 매우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평범한 인간 백 목사를 보훈의 달 6월에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백 목사가 올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동지애 “충무무공수훈자”“전북지부장의 위로와 배려가 있었기에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하면서 인생의 멘토로 그분을 무척 따르고 존경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 김경순씨의 내조의 덕, 김경순씨는 40년이 넘도록 남편의 이름도 과거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런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보통 여성 같으면 당장 이혼이란 말이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따뜻이 감싸주고 오히려 절망에 빠진 남편을 위로하며 현대판 烈女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신분이 들통이 나니 적응 할만 하면 이사 또 이사…. 그것도 밤중에 갑자기 떠나야 하니 전국 어디 안 가본 곳이 없었답니다 지금 훌륭하게 자라준 자녀교육은, 학교를 수도 없이 전학을 했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 종교의 힘 즉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면 벌써 세상 잃어버렸다.”라고 하면서 백 목사의 눈에 이슬이 맺혀있었습니다. 6월! 지금까지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또 외면하고 있었던 우리 사회에 그늘이 있었고 고독과 외로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파공작원 그들은 흉악한 살인자도, 범죄자도 아닌 분단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요 희생양이었을 뿐입니다.

 보훈의 달 6월에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주고 편견을 버리는 일. 그것만이 이들의 삶과 희생을 보상하는 길입니다.

조금숙<광복회 전라북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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