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읍성 소나무
무장읍성 소나무
  • 진동규
  • 승인 2014.05.1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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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무장읍성의 동헌이었던 취백당에 있는 소나무다. 훌륭한 정원사가 길러낸 소나무가 아니라 무장성이 길러낸 소나무다. 아니다, 누구도 길러주지 않았다. 무장읍성과 함께한 소나무다. 읍성이 겪었던 세월 굽이굽이 한 음보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어낸 악보다. 아니 악보도 아니다. 그렇게 자상하신 작곡가가 있어 옮겨 주지도 않았다. 제 스스로 단가 한 소절씩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끊길 듯 이어지는 소리는 타령인가 싶으면 정악이고 간간이 편경 소리로 들리고 아쟁 가락도 흘러나온다.

 꺾인 허리를 보면서 지팡이 하나 다듬어 줄까 하다가 다시 보면 어깨가 아직 짱짱하다. 탱자나무 북채를 쥐어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당 질펀하게 펼쳐보일만한 기상이다. 취백당 앞에는 언제든 덕석이 깔려 있다.

푸를 취, 흰 백 자를 썼다. 푸른 소나무 아래 반짝이는 모래밭이란다. 무장현감 사또 부임하면서 고을의 선비들께 동헌의 이름을 주문했다고 한다. 객사의 형액이 송사지관, 소나무 송에 모래 사다. 고려에서 무송현과 장사현을 병합하면서 첫 글자를 따다가 무장현이라 했는데 객사는 뒷글자를 음차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훌륭한 시문학을 생활화하였던 민족이었다. 시조에 창법까지 완벽하게 갖추어 노래로 부르지 않았던가. 관청의 이름 하나도 그윽한 정취가 향이 풍겨나게 하지 않았던가.

 무장읍성은 처음 무혈입성한 곳이다. 남문에 맨 처음 사발통문을 내걸고 혁명을 천명했던 곳이다. 그래서 필연으로 겪어야 했던 수난의 땅이다. 일제가 들어오면서 행정구획을 면으로 격하시켰다. 무장 사람들 참 대단한 분들이다. 일제가 전 국토에 문화 흔적을 지우기 위한 정책을 잘도 이겨냈다. 성곽이며 객사, 동헌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동헌을 부수고 초등학교를 지으라고 했는데 벽만 털고 창문을 달았다. 그대로 교실로 사용했다.

객사 자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하자 했는데 기둥 하나도 빗돌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내부구조만 사무실로 바꾸어 놓았다. 남문은 뉘 집 제각으로 팔렸다고 하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지켜냈다. 전화위복이 반드시 있다던가. 읍이 면으로 변해버렸으니 인구 감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을 헐어내고 도로를 넓힌다거나 집을 지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성터 어디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취백당 앞 소나무뿐이 아니라 성과 함께 자리를 잡고 몇 아름씩 되는 느티나무들 제 언덕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썩어 물러난 세월의 상흔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온다.

 지금 무장읍성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크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지만 옛 사람들의 체취를 물씬 느끼게 할 수 있는 계단식 우물은 얼마나 흥미로웠던가. 웬만한 씨름판보다 크게 터를 잡아 파내려 갔으니 샘은 얼마나 깊었을까. 그렇게 찾아낸 물줄기로 연지를 만들고 연꽃을 피워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은 정갈한 꽃이어서 부정한 기운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이 나갔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다. 부정을 타면 나가기도 하고 다시 들어오기도 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다면 연은 사람과 더불어 깊은 자원의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꽃이리라.

 일상의 그림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새한도다. 새한도에 그려진 집은 기와를 얹지도 않은 움막 같은 것에 창 하나 나 있을 뿐이다. 창 밖에 노송이 한 그루 기묘한 자세로 서 있다. 우리나라 산야 어디에서나 가장 흔한 것이 소나무다. 그런데 완당의 소나무 같은 모양은 어디에도 없다. 유일하게 한 그루 취백당 뜰에 있다. 취백당의 우물물을 마시러 왔을 터이다. 선운사 석전의 빗물을 써주고 갈증도 있었으리라. 그 소나무를 감동으로 만났을 터이다.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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