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얻는다
버려야 얻는다
  • 김종일
  • 승인 2014.05.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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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적인 사고’라 불리는 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라고 알려졌다. 오늘날 ‘자연철학자’라 불리는 당시의 선구자들이 남긴 선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무신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의 모든 것을 수학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수학적 세계관이다.

 우리가 잘 아는 피타고라스는 ‘수(數)’를 신봉하는 교단의 교주였는데, 삼라만상의 근원은 수이며 궁극의 세계는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라 주장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가 어떤 계기로 그와 같은 기기묘묘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현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초석 중 하나를 세운 것은 분명하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서양 철학의 중추적 인물 중 하나인 플라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며, 플라톤에 의해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정형화된다.

 플라톤의 자연철학은 ‘이데아’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가 말하는 이데아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험 세계의 뒤편에 숨어 있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의 세계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완전한 세계라고 해도 좋겠다. 만약에 조물주가 있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가정한다면, 태초에 조물주가 손에 쥐고 있던 설계도가 이데아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데아의 세계는 완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플라톤은 참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가 바로 수학 세계요 기하학의 세계라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듯이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적혀 있었다.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가 바로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인데 그것들을 모르고서는 진리에 대해 논의하는 게 무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는 20세에서 30세까지 무려 10년 동안 수학과 기하학만을 가르쳤다.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하게 습득한 서른 살 이상의 학생들이 비로소 자연철학이라는 영역을 접할 수 있었다. 동양과 달리 수학을 중시하는 서양의 교육체계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플라톤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 즉 경험적 지식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조물주와는 달리 플라톤의 조물주는 전지전능하지 못했다. 비록 설계도는 완벽했지만, 세상을 만드는데 소요된 재료들(물, 불, 흙, 공기) 자체가 불완전해서 설계도대로 세상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겨우 이데아의 시늉만 담아냈다는 설명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 지극히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이데아를 향한 눈을 가리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경험적 지식을 철저히 버려야 하며 오로지 냉철한 수학적 이성을 통해서만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창했다.

 당시 자연철학에 있어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가 흔히 천동설이라고 알고 있는 천문 이론이다. 어느 날 그는 제자들에게 행성들의 운동을 원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숙제를 냈다. 플라톤은 동그란 원이 가장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이기 때문에 완전한 하늘의 세계는 반드시 원운동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후 2천년 동안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 에우독소스라는 사람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천동설 모형을 만들었다. 이 모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을 비롯한 다섯 개의 행성이 원운동을 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이었다. 당시 천문 관측 자료와 엄밀한 비교를 통해 수십 개의 원운동의 조합으로 음양오행의 운동을 설명하는 지구 중심의 천동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끔 오늘날 대학에서 물리학이나 수학을 전공하는 4학년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내주면 풀 수 있는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2천년이 지난 후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옳다고 배우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등장했는데 정확도 면에서는 지구중심설이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만큼 2천5백년전 그리스 학생들의 수학적 능력은 뛰어났다. 지구를 버리고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선택한 코페르니쿠스마저도 플라톤의 주장과 같이 행성들은 원운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당시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새로운 세상은 자신을 포함한 당시 모든 사람의 믿음을 버린 사람에 의해 열렸다. 플라톤을 누구보다 신봉했던 케플러는 플라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문 관측 자료를 분석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도 충분한 정밀도로 관측 자료를 재현하지 못하고 있던 케플러는 드디어 자신이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던 신념을 버리게 된다. 바로 플라톤이 옳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하늘의 세계 다시 말해 이데아는 완전하다는 생각을 버리자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행성의 원운동을 포기하고 타원운동을 생각해낸 것이다. 케플러의 타원궤도의 법칙이 그것이다. 아마 그가 아무도 버리지 못했던 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의 생활이 17세기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김종일<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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