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을 기다리는 문화재
등록을 기다리는 문화재
  • 유병하
  • 승인 2014.05.0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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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을 읽다보면 전북의 처지를 되돌아 볼 때가 많다. 최근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등록과정을 살핀 논문과 시도별 문화재 등록 현황을 알려주는 행정백서를 읽어볼 수 있었는데, 전라북도의 현실과 어우러져 여러 가지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올해 초에 답사한 몇몇 유적과 오버랩이 되면서 아쉬움은 더 짙어졌다.

사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반도의 문화재는 1916년에 이미 등록되어 관리되기 시작했다. 즉 일제가 조선의 고적·유물을 통제하고 고적조사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고적및유물보존규칙’을 공포하고, 이를 실행할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도 ‘사찰령’, ‘향교재산관련규정’, ‘신사사원규칙’ 등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불법행위가 계속 만연하자 부득이하게 생겨난 조치였다.

그러나 기존의 ‘보존규칙’으로는 ‘유실물법’이나 ‘사찰령’과 같은 상위 법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1933년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호령’을 제정하고 조선총독부의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위원회’로 하여금 자문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 결과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이 지정되었는데, 이 때 남대문이 보물 1호가 될 수 있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도 문화재등록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자 일제강점기의 그것을 우리의 실정에 맞추어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우리만의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예컨대 등급과 종류도 다양하게 하고, 시·도별로도 지정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사전조사와 심의 등의 절차도 일제강점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강화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보나 보물, 사적, 등록문화재, 도유형문화재, 도기념물과 같이 분류·지정된 문화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문화재등록시스템은 오랫동안의 시행착오를 극복하여 우리식으로 완성된 제도이고, 그 연원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100년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보 360건, 보물 2,304건, 사적 486건, 명승 107건 등을 분류·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중에는 시도에서 지정하는 유형문화재가 3,218건, 시도기념물이 1,686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등록된 문화재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소재지나 소유권 이전, 현재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현장에서의 발굴조사와 응급 보존처리, 실내에서의 원상복구 등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와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알리는 노력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학술세미나 개최, 연구조사보고서 발간, 다큐영상물 제작, 기획전시 개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재의 등록이다. 등록된 문화재는 제도권 내에서 충분한 관심과 관리를 받을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문화재는 세인의 관심도, 체계적인 관리도 없는 상태에서 쓸쓸히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곧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문화재의 파괴나 멸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뿌리 혹은 영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문화자산을 통한 지역 발달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현재 전라북도에는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유형문화재가 206건, 기념물은 110건으로 각각 전국의 6.4%와 6.5%에 불과하다. 이웃한 전라남도의 경우에는 유형문화재와 기념물이 226건과 194건이고, 경상북도의 경우에는 402건과 146건이다. 상대적으로 지정된 문화재의 수량이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문화재를 찾아서 조사하고 등록하려는 노력의 차이가 아닐까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올해 초에 다녀온 군산 선유도의 오룡묘(五龍廟)와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일 것이다. 오룡묘는 오랜 세월 고군산열도를 지나가던 뱃사람들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곳으로 인근에는 고려시대의 행궁(行宮)터와 절터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고려 이후의 해상교류와 해양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군산시의 뿌리[고군산]를 이루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충분한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편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그 존재와 중요성이 알려졌지만 최근에서야 제한된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결과 전라북도에서 내륙 유일의 청자가마이고 가장 이른 단계의 벽돌식 가마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비단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자발달사에도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지정문화재로 등록조차 되지 않아서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마한을 품었고, 백제가 성장했으며, 후백제의 본고장이고, 조선왕조의 본향이었던 전라북도에는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들을 찾아내고 조사한 후 지정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체계적인 관리가 되게 하고, 문화자산으로 적극 활용하게 하는 것이 문화융성시대의 우리에게 닥친 중요한 현실이 되었다. 해당 시군과 전라북도가 이런 일에 적극 나섬으로써 문화전북의 자존심을 이제부터라도 되살려내는 것이 어떨까한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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