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의 비밀
서편제의 비밀
  • 박재천
  • 승인 2014.04.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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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편제’(임권택 감독, 1993년 作)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 중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화제작일 뿐 아니라 세기의 대작임이 틀림없다. 탄탄한 원작(이청준 作)을 바탕으로 탄생한 영화 ‘서편제’는 여주인공 ‘송화’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의 ‘한(恨)’을 진하게 표현했다. 또 한국의 전통음악 ‘판소리’가 영화 ‘서편제’를 통해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화 ‘서편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간단한 판소리 어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방인 남원, 구례, 운봉 지역에서 불린 소리가 ‘동편제’다. 반면 이 강을 기준으로 서쪽 지방인 나주와 광주, 보성 지역에서 불린 소리가 ‘서편제’다. 동편제는 강하고 우직하며 남성적인 소리인 반면 서편제는 보다 여성스럽고 섬세한 소리가 특징이다. 강산제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섞여진 소리이다.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영화 ‘서편제’는 단연 으뜸가는 이야기 소재다. 그들은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의아했던 부분을 질문하기 시작했는데 주인공 ‘송화’ 역의 오정해가 어떻게 어린 소녀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 여인의 일생을 연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외모의 변화는 분장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나이가 듦에 따른 구질의 변화를 표현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물론 어린 송화의 소리를 제외한 그녀의 중년과 노년 시절의 소리는 립싱크다. 어린 송화의 소리부분만 실제로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의 소리며 중년과 노년의 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대중가요나 쉬운 노래에선 립싱크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장단과 성음으로 이뤄진 판소리에서 립싱크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 나는 여기서 판소리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포인트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송화’ 역을 열연한 여주인공 ‘오정해’는 소리꾼이다. 어린 송화의 목소리는 오정해 본인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년의 여성이 된 송화의 소리의 주인공은 오정해의 스승 안숙선(1949-, 국악인/당시 44세)의 구음 출연으로 완성됐다. 노년의 소리의 주인공은 안숙선의 스승인 국악인 故김소희(1917-1995,인간문화재/당시 76세)선생이다. 판소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특수한 도제 시스템을 통해 전수된다. 스승이 제자에게 판소리를 사사하고, 성장한 제자는 당신이 전수받은 소리를 그대로 다음 제자에게 가르친다. 이렇게 故김소희 문하의 안숙선, 그리고 오정해로 이어진 동일한 소리로 인해 완벽한 립싱크가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국 전통음악의 판소리는 얼마나 깊은 수고와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창자 한 개인이 완성을 해나가는 음악인가’하고 말이다. 당시 20대 초반의 오정해의 소리와 당시 70대 중반이셨던 故김소희 선생의 소리에는 약 오십년의 세월의 차가 있다. 그 세월의 간격은 그만큼의 공력과 정성이 더해진 시간이기도 하다. 참 놀라운 것은 유럽이나 일본의 음악가들이 영화를 보며 그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소리의 구질이 변해가는 과정, 어린 오정해의 소리부터 최후의 소리인 故김소희 선생의 소리까지 변화를 느끼고, 깊은 공력이 쌓여간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의 판소리는 한 개인이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는 수고와 노력을 통해 터득해가는 과정이다. 영화 ‘서편제’를 통해 판소리의 이러한 측면을 대중이 직접 마주하게 됐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영화 ‘서편제’는 그저 한 맺힌 주인공 ‘송화’의 감동적이고 영화적인 스토리가 전부가 아닌 음악사적으로 판소리의 위대함을 담아낸 영화다. 나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하는 축제의 감독으로서 축제의 전체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나는 이제 막 소리를 막 시작한 젊은 소리꾼부터 깊은 공력을 가진 어른까지 어떻게 우리의 무대를 배치해줘야 하는가에 깊이 고민하고 있다. 단순히 프로그램 편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의 수고를 먼저 알아줘야 하는지에 대해 늘 고민스럽다.

 박재천<전주세계소리축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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