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를 모시고 재가한 며느리
시어머니를 모시고 재가한 며느리
  • 이방희 기자
  • 승인 2014.04.13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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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면 안되지요." 3월 21일 점심, 스훙현 ?거우진(雙溝鎭) 화원단지에서 한 여성이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한테 죽을 숟가락으로 떠서 대접하고 있었다.

 죽사발을 든 여성은 셰훙쥐안(謝紅娟)이라고 하며 올해 36세이다. 침대에 누운 이는 그녀의 시어머니로서 왕세훙(王雪紅)이라 부르는데 올해 58세이다. 셰훙쥐안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정성껏 시어머니를 모셔왔다.

 1999년 3월, 셰훙쥐안은 ?거우진의 농민 뤄젠카이(羅建凱)에게 시집을 왔다. 시아버지는 술담배를 좋아하였는데 신체가 매우 허약하여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찰 정도였다. 시어머니도 쉬운 가사노동밖에 거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계를 위하여 남편은 외지에 일하러 갔고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그녀 혼자 감당하여야 했다.

 2007년 4월, 남편 뤄젠카이는 일터에서 뜻밖의 전기 안전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셰훙쥐안은 생활에 대한 자신감마저 잃어 버릴 정도였지만 연로한 시부모님과 두 아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억척같이 버티어 나갔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그 해 여름 시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며칠이 안되어 셰훙쥐안은 친정의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친정 아버지가 위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던 그녀는 친정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에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가 있었다. 옛날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게 된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생명을 건지긴 하였으나 후유증은 전신마비로 이어졌다. 퇴원 후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짐이 되기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나 단식까지 하였다. "어머님, 저는 살아도 죽어도 모두 뤄씨 집 사람이예요. 어머님을 돌보는 것은 천리에 마땅한 일이지요. 만약 어머님께서 계속 고집을 피우시면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며느리의 간곡한 요청에 시어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셰훙쥐안은 시어머니 그리고 두 아이와 의지하면서 생활해 나갔다. 친구들은 그녀의 생활을 염려하여 젊은 나이에 빨리 재가를 서둘러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셰훙쥐안은 시어머니도 함께 모시는 조건이라야만 재가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두 아이가 딸린 것만 해도 그런데 세상에 어떻게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재가한담?!" 동네 사람들은 의논이 분분하였지만 이웃마을의 가오뤄이보(高瑞波)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몇 년 전 아내가 말도 없이 가출한 후로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생활해 왔었다. 그는 셰훙쥐안과 함께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기를 자처하였다.

 2009년 셰훙쥐안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가오씨 댁으로 재가하였다. 가오뤄이보는 아내의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내한테 노인의 머리를 빗겨 드리는 방법, 식사 대접하는 방법, 양치, 안마 등을 모두 가르침 받았다. 전신마비로 침대에만 누워 지내기에 노인이 가끔 실수를 할 때도 있지만 그는 오히려 아내보다 먼저 빨래를 깨끗이 빨아 놓았고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부부는 틈만 있으면 노인의 침대 옆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도 들려 주면서 노인을 즐겁게 해드렸다. 노인이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을 때마다 부부는 역시 정성껏 대답해 주었다.

 셰훙쥐안은 강인하게 한 가정을 지탱해 왔고 그의 사연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지난 해 그녀는 "중국 호인(好人)"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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