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약속이다
문제는 약속이다
  • 이춘석
  • 승인 2014.04.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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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그것을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4월 국회의 시작과 함께 열린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는 기초공천 폐지를 지키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잘못된 약속에 얽매이기보다는 겸허히 용서를 구한다고 강변했다. 대통령이 수차례 약속한 대선공약이고 내로라하는 여당 중진들이 법안까지 제출한 사안이지만, 정작 대통령은 침묵으로 버티고 생뚱맞은 여당 원내대표가 대리 해명하는 진풍경이라니… 사고는 조폭 보스가 쳐도 잡혀가는 것은 행동대장이라는 3류 폭력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사실 기초공천제 자체는 엄청나게 심오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제도는 저마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폐지될 수도 존속될 수도 있다. 기초공천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1차 검증을 가능하게 하고,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진출을 돕는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풀뿌리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될 우려가 있고 줄세우기 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기초공천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지 일부의 주장처럼 기초공천이 폐지된다고 해서 위헌이 되거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약속이라는 점이다. 지난 대선 때 여야 모두가 공천 폐지를 공약한 이상 기초공천제는 없애는 것이 원칙이다. 기초공천제 폐지가 완전무결한 대안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2006년 정당공천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공천제로 인한 장점보다는 부작용이 더 컸던 만큼 이제는 새로운 제도도입을 충분히 실천해 볼 때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공천제 폐지를 공약한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대통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여당은 공천폐지에 반대하더니 급기야는 대리 사과라는 희한한 모습까지 연출했다. 국민과 약속했던 기초공천제 폐지를 지키려는 노력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다는 속담이 이보다 어울리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했던 미생지신이라는 고사가 있다. 춘추시대 노나라에 미생이라는 청년이 살았는데, 큰 비가 내리는 중에도 다리 밑에서 애인과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4년 전 세종시 논란이 있었을 때 박 대통령은 미생을 이야기하며 원칙을 고수해 신뢰 이미지를 쌓았다. 불과 4년 전 대통령 안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던 미생은 지금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선승리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단 말인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설령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그 부분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특히나 정치적 공약이라고 한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표를 준 국민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최대한 상세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며 가능한 한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 후퇴한 공약들을 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경제민주화, 기초연금 등이 문제가 되자 주위에서 현실론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 활성화가 우선이다, 기초연금을 다 드리고는 싶지만, 재원이 부족하다는 식이다.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다. 그다음에는 여당이나 정부가 실제 조치에 나선다. 경제 민주화법은 발목을 잡고 규제 완화에는 날개를 단다.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등과 연계시켜 정부의 지원액수를 줄이려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여전히 아무런 말씀이 없다. 그렇게 대통령이 불편한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사이 공약들은 하나씩 파기되고 있다. 기초공천 폐지와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기초공천은 기초공천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초공천제 폐지는 하나의 사안이 아니라 약속의 문제이자 신뢰의 문제이다. 대통령의 침묵 속에 앞으로 다른 공약들이 파기되는 일이 없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초공천제를 둘러싼 지금의 논란에서 결국 핵심질문은 하나다. 박 대통령은 공천제 폐지 약속에 응답해야 한다.

 이춘석<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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