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均館 巴里長書 全北儒林(성균관 파리장서와 전북유림)
成均館 巴里長書 全北儒林(성균관 파리장서와 전북유림)
  • 황병근
  • 승인 2014.04.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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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28일 성균관 정기총회와 성균관장 취임식 그리고 성균관유도회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차로 서울을 다녀왔고 29일에는 한국유림 파리장서비

제막식 참석을 위해 전북 고창 새마을공원에 다녀왔다. 제30대 성균관장 취임식은 전북

출신이 광복후 70년 조선조 이후 600년동안 차지하지 못했던 전북 남원출신 서정기(徐正淇)관장의 취임식이였기에 참으로 의의깊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동안 16년여의 1인 독단과 부정비리로 얼룩진 성균관을 가장 민주적인 정관개정을 통한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진정한 유도이념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시대사회의 모범이 되는 성균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는데 더더욱 자부심과 함께 경하해 마지 않는다. 신임 서정기 관장은 〃성균관의 시대적 사명은 도덕을 일으키고 윤리를 밝히고 예절을 실천하는 집단으로 재건되는 것이며 성균관장의 사명은 전통문화가 단절되고 있는 이땅에 효도사상을 일으켜 가정을안정하고 충성심을 복돋아 나라를 문명하게 하고 인의도덕을 깨우쳐 화평세계(和平世界)를 건설하려는 의지와 정열을 만천하에 표명하는 것이다. 라며 일천만 유림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맹지도(孔孟之道)의 유교이념은 삼국시대 이후 국가통치이념으로 교육해 왔으며 인재양성을 위한 촤고학부의 기원은 중국주(周)대에 천자의 도성에 설립한 대학인 벽옹(壁雍)과 제후의 도읍에 설립한 반궁(泮宮)의 제도에서 비롯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2년 (372년)의 태학(太學)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資監)이 1308년 충열왕 이후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되였으나 잠시 국자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 공민왕 1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여 조선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균(成均 )이란 어원은 성인제(成人材 인제를 성숙시킴)하고 균풍속(均風俗 풍속을 고르게함)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조선에 침입하여 1895년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1905년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약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06년 간접통치를 위한 통감부 설치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1910년 우리나라를 완전히 강탈한 경술국치로 조선은 일제의 식민치하에 묶이고 말았다. 절의를 생명으로 하는 올곧은 선비 매천 황현 연제 송병선 심석 송병순 회제 장태수등은 치욕을 못이겨 자결을 하는가 하면 뜻있는 유림들은 일제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의병(義兵)투쟁등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의 주도로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파리평화회의가개최되는 것을 계기로 조선 유림들은 전세계에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연히 붕어(崩御)하신 고종의 국장일인 3월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각계각층 남녀노소 없이 참여하여 7509명이 살해를 당하면서도 외쳐댔던 항일만세 독립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뜻있는 유림들은 억압적인 폭력과 수탈을 일삼는 일제 식민통치의 참상을 폭로하고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촉구하는 총 1,423자(한문)로 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준비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참여한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제출하는등 국내외에서 독립투쟁에 나섰다.

 유림들은 〃붓의 투쟁 〃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에서 〃우리는 차라리 자진하여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가 될수 없으며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인민과 사천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어찌 남의 나라의 대치(代治 )를 바랄것인가 한국도 모든 나라가운데 하나이니 어찌 우리나라만 평화롭지 않게 하리오 폴란드 등 여러나라가 평화회의 에서 독립이 결정되었다니 저들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이리오 나라없이 사는것은 나라있고 죽는것만 못하며〃 등등의 내용으로 호소하였다. 파리장서에는 명망있는 유림대표 137명이 목숨을 걸고 참여 했는데 유림대표들은 심산 김창숙 선생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했는데 심산은 1919년 3월말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파리장서를 짚신으로 엮어서 기차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간뒤 영어 중국어 불어 독어로 번역해 수만부씩 인쇄해서 파리에서 활동중인 김규식 선생등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에게 현지에서 배포하도록 우송하여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것이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중 호남출신이 10명인데 그중 네분인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선생께서는 전북 고창출신으로 네분 모두가 동래부사를 역임하시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선생의 후손이며 1876년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1905년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 1906년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등을 올려 항일척사 운동에 앞장섰던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선생의 제자 들이다. 의병장 출신 선조의 피를 이어 받았고 구국지사인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였기에 목숨을 내건 구국대열에 앞장설수 있었을 것이니라 그동안 영남과 서울 유림세력에 밀려 차지하지못했던 성균관 제30대 서정기관장의 취임식은 전북유림의 쾌거(快擧)라 아니할수 없으며 국난을 당할때 마다 임진왜란도 전북의 절의정신에 의해 격퇴하여 약무호남사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영예를 얻게되었으며 한말 일제침략을 막는데도 전북의 구국정신이 파리장서로 세계만방에 일제의 흉계를알렸던 전북 선비정신의 장거(壯擧)라 할것이다.

황병근 <성균관유도회 전라북도본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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