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자산 아닌 중바우, 승암산이다.
치명자산 아닌 중바우, 승암산이다.
  • 이용숙
  • 승인 2014.03.27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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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이 난에서 정명(正名)에 관하여 피력한 바 있다.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영역에서 최우선의 요구이다. 그 글에서 영호남을 ‘호영남’으로 바로잡아, 호남인의 권위와 자존을 회복하자고 역설했는데, 성과는 미지수인 성싶다.

땅이름[地名]은 그 땅의 모든 역사와 문화를 포함한다. 거기에는 전통과 긍지는 물론 그곳에 사는 이들의 숨결과 생명이 녹아 있다. 순우리말이었던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한자로 바뀌었고, 특히 일제에 의해 편의주의로 무참하게 도륙당한다. 우리가 사는 읍?면의 경우 동면?서면?남면?북면이 그렇고, 심지어는 북일면?북이면?북상면?북하면까지도 잔존하고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산내?산외?산동?산서라고 부르는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어디에도 훈훈한 정서나 역사의 향기는 찾을 수 없다. 물론 일제의 문화 말살을 획책한 만행에서 비롯된 것이 자명하다.

○ 공주 일락산의 사례

  일제의 지명에 대한 왜곡 만행은 공주의 산이름에도 보인다. 공주가 백제의 고도였고, 조선후기 충청도 전지역의 중심지였는데, 그 뒷산 이름이 일락산이다. 그런데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60년대에는 이 산을 월락산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도시의 서쪽이니 달도 지고 해도 그곳으로 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릴 적 서당에서 『추구』를 배울 때 짧은 5언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일락서산하 월출동령상(日落西山下 月出東嶺上)”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락이 아닌 ‘월락’에 의구심이 일었다. 그러다 이 지역의 고지도를 보면서 크게 놀랐다.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의 이름이 ‘일락산’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해가 지는 것을 일본의 패망으로 염려하여 해를 달로 둔갑시킨 것은 아닐지?

그 뒤 공주지역의 뜻있는 문화계 인사들과 수 차례 논의하고, 문화원 기관지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지역 학술대회에서 토론을 거듭한 끝에, 잘못 불려진 월락산을 ‘일락산’으로 되찾은 것이다. 물론 국토지리원에도 알려 수정하고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름 하나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고, 자존과 품격이 있는 것이다.

○ 천주교의 성지들

지난 2월 로마 교황청은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초기 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결정하였다. 시복이란 하느님의 종들에게 ‘복자’라는 칭호를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도내에 산재한 카톨릭 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여론이 점화되고 있다. 영혼이 잠든 순교지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 전북지역에는 천주교 관련 유산이 국내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미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을 비롯하여 숲정이?순교자묘?익산나바위성당 등 지정문화재가 11개에 이른다. 이밖에도 천호성지?초록바위?풍남문 등을 더하면 모두 20여 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좀더 학문적인 성과의 축적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해당 유산의 보수와 정비, 추진 기구의 결성, 천주교와 행정 당국의 적극적인 협력체계가 요구된다. 여기에 지명에 대한 재고도 빼놓을 수 없다.

○ 중바우?승암산 순교자묘

전주의 「천주교 순교자묘」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어 수많은 신자들이 순례하는 곳이다. 조선 순조 원년(1801) 신유박해 당시 순교한 일곱 분이 묻힌 성지이다. 호남의 천주교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내 신희, 그리고 동정부부로 유명한 장남과 며느리, 차남, 제수, 조카 들이 순교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순교자묘가 자리한 산의 이름을 언제부터인가 ‘치명자산’이라 부르고 있다. 더욱이 기린로를 따라 춘향로 곳곳에는 도로 안내판마저 ‘치명자산 성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모든 옛 지도에 적혀있는 중바우 또는 승암산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치명’을 사전에서 보면 ‘목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름’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치명적?치명상 그 어떤 어휘도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부정적인 말이다. 설사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라는 종교계의 의미가 있다 하여도 그다지 밝은 느낌은 아니다. 순교라는 숭고한 어휘가 있다.

도 문화재로는 명백하게 ‘천주교 순교자묘’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 바로 치명자산이라는 이름은 내려놓아야 한다. 그 산은 수천 년 이래 승암산 또는 중바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전주의 문화?역사?긍지이며 자존이다. 중이나 승려가 불교적 색채라서 거부감을 느낀다면, 비로봉이나 관음봉 문수봉은 어찌할 것이며, 석가산이나 달마산은 또 어찌할 것인가. 불교 아닌 무속이나 도교사상, 또는 유교와 관련된 수많은 명칭은 또 어떻게 개명하려는지.

행정도 반성해야 한다. 어느 단체의 요구라 해서 신중한 검토와 공청회도 거치지 않고 그런 오류를 자행하는가. 일본의 역사 왜곡만 왜곡이 아니다. 민족의 정기와 역사 숨결 정서가 녹아 있는 전주의 중바우?승암산을 얼토당토 않은 치명자산에서 다시 살려내야 한다. ‘중바우 천주교 순교자묘’라 하면 어떨지…….

 이용숙<전주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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