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학농민군의 편지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어느 동학농민군의 편지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소인섭 기자
  • 승인 2014.03.20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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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完)

 ◆동학농민군 유광화가 동생 유광팔에게 보낸 편지

 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際煩舍弟光八卽見)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國家患難民之所患)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余出家逗逼於數年不顧家事)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固然不似子道也)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與之倭軍屢日戰之)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所以報恩之也)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려워  (然而事勢極難故)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囊者遣財多少要需之)
 사정이 어려워져 또한번 돈과 비단을 청하니  (近況極甚於前故)
 살펴 주길 바라네.  (通察付送之)
 또한 매우 급한 일이라네.  (?眉之急也)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일세.  (死生縣命國運)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後事所託於昆弟)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摠摠不備禮)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甲午 晩秋 兄 光華)

 위의 편지는 1894년 늦은 가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유광화(劉光華)가 고향에 있는 동생 유광팔(劉光八)에게 보낸 것이다. 유광화는 1858년 전라도 나주 다도에서 유몽렬과 김해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화(光華)는 그의 자(字)로 본명은 유재희(劉載熙)이며 호(號)는 죽산(竹山)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하는데 온힘을 다했으며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성격은 올곧아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했으며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런 그에게 당시 조선의 상황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관리들의 수탈과 학정으로 백성의 삶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유광화의 선택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는 것 외에 다른 방안은 없었다. 그는 조선이라는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상황에서 이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조선이라는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백성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같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유광화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광화는 36세였으며 5살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광화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광화는 휘하에 700여 명의 농민군이 있었으며 주로 군사물자를 조달하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는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편지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동생에게 동학농민군들이 필요한 재물을 조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에도 동생 광팔이 재물을 조달해준 적이 있었던 것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유광화는 2차 봉기 과정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때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합류해 활동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2차 봉기가 결정되고 삼례에 올라와 있던 최경선은 전봉준과 상의한 후 광주·나주로 가서 손화중과 함께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을 대비했다. 유광화는 이 과정에서 농민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동생에게 다시 한번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유광화가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시점은 바로 1894년 11월 쯤으로 짐작된다.

 공주 우금치에 패한 동학농민군은 논산 황화대와 김제 원평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패했다. 이후 태인전투에서도 크게 패하자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렇게 되자 1894년 11월 27일 광주를 점령하고 있던 손화중과 최경선도 곧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이후 12월 1일 광주를 떠난 최경선은 남평에 들러 식량 등을 거뒀고 약 200여 명을 이끌고 동복(화순)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최경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체포돼 사살되거나 나주로 이송됐다. 유광화는 이때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랬던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이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다. 한문으로 작성된 편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광화는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농민들이 주를 이뤘지만 상당수의 지식인들도 참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 한가지 눈여겨볼 것은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방법이 매우 합리적이었다는 점이다. 양반이나 부자들에게 강제로 탈취하는 방법보다는 최대한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또 편지의 내용을 통해 1894년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들의 실제 생활의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라는 표현은 당시 농민군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대목이면서, 유광화라는 사람이 어떤 감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짐작하게 한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어느 이름도 없는 언덕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누워 다음 전투에 임해야 하는 유광화와 동학농민군의 절박한 마음이 전달된다.

 유광화는 진정 자기 삶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무던히 애를 쓴 흔적이 몇 자 되지 않는 이 편지에서 절절히 느껴진다. 유광화는 과연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유광화는 그가 꿈꾼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실천에 옮겼다. 비록 그것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남아 있음을 잘 안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지난 오늘, 유광화가 꿈꾼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실천한 것처럼 그 과제는 현세인에게 던져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지켜지는 세상, 그것은 진정 누구나 바라는 세상이며 1894년 동학농민군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유광화의 편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소인섭 기자
 이병규<농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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