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상생, 그리고 나눔과 배려의 실현
동학농민혁명…상생, 그리고 나눔과 배려의 실현
  • 소인섭 기자
  • 승인 2014.03.13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9)

 ▲백성을 위해 일어난 전봉준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꾼 동학농민혁명은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전봉준은 주어진 상황과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일대 변혁을 위한 대규모 민중봉기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전봉준은 왜 그렇게 어려운 조건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까? 이와 관련해 전봉준의 심문기록인 ‘전봉준공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심문하는 사람이 “너는 해를 당함이 없는데 소요를 일으킨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전봉준은 “나 자신이 핍박당한 것을 풀기 위하여 봉기함이 어찌 남자된 자의 행동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원통해 하고 한탄하는 까닭에 백성들에 대한 핍박을 제거하고자 해서 일으켰다”고 대답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까닭은 전봉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일반 대중들, 그중에서 핍박받아 원통하지만 한탄하기도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이타적인 인간존중을 실현한 전봉준의 박애정신은 대단히 고귀하고 품격 있는 사상의 결과이자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의 발로였다. 이러한 전봉준의 정신은 어떤 측면에서는 동시대를 살고 있던 일반 대중들과의 ‘상생’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생의 정신을 실현한 전봉준

 상생(相生)은 음양오행설에서 기인한다. 금(金)은 수(水)와, 수는 목(木)과, 목은 화(火)와, 화는 토(土)와, 토는 금과 조화를 이룸을 이르는 말로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어 나가면서 끊임없이 상생의 정신을 실천으로 옮겼다. 먼저 동학의 정신에서 ‘상생’을 찾을 수 있다. ‘유무상자(有無相資)’는 가진 자(富者)와 없는 자(貧者)가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상생의 실천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무상자의 정신은 최제우의 동학 창도 이후 동학의 이념적 실천적 행동기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94년 5월 8일 전봉준은 초토사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의 실행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넘겨줬다.

 전봉준은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한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홍계훈의 관군과 협상을 통해 전주화약을 맺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주화약은 지극히 상생의 관점을 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1894년 7월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관과 민이 함께 통치하는 형태)의 원칙 아래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 설치를 합의하고 김학진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약 2개월간 집강소를 통한 농민자치를 실현한 것 역시,‘상생’의 실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또한, 상생의 실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접과 북접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2차 봉기에 합의하고 이를 실천했다.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거의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 그리고 최시형·손병희 등 주요 지도자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들을 설득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바로 ‘상생’의 실현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물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실천한 동학농민군

 동학농민군들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실천했다. 이는 ‘상생’의 관점을 견지한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신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농민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아간 곡식이나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그것을 빈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동학농민군은 ‘항상 부자로부터 재물을 탈취하여 빈곤자를 진휼하고 혹은 약탈한 미곡을 시가에 비해 저가로 판매하였으며 오직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짜서 치부한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을 뿐, 양민을 전혀 괴롭히지 않아서 의적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돼 있다.

 실제 충청도 회덕·옥천·진잠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은 관아와 양반 지주들로부터 탈취한 곡식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러한 탓에 일본 공사관 보고 자료에는 ‘인민들이 농민군을 의군으로 여겨 내심 찬미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기록돼 있다.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동학농민군들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농민군들이 전라도 영광에 주둔하던 1894년 4월 12∼16일 사이에 발표한 ‘대적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이다. 이는 농민군 규율을 단속하는 행동준칙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적시 약속 4항>

 1. 매번 대적할 때 병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의 공으로 삼는다.
 2. 부득이 전투를 하더라도 절대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3. 매번 행진하여 지나갈 때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해치지 않는다.
 4. 효제충신한 사람이 사는 촌락으로부터 10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12조 계군호령> 

   1. 항복한 자는 받아들여 대우해준다.
 2. 곤경에 처한 자는 구제해준다.
 3. 탐묵한 관리는 쫓아낸다.
 4. 공순한 사람에게는 경복한다.
 5. 도망가는 자는 추격하지 않는다.
 6.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을 먹인다.
 7. 간활한 자는 그 짓을 못하게 한다.
 8.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에게는 효유한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약속 4항’에는 인명을 중시하는 내용이 주목되며, ‘12조 계군호령’에는 부정하고 탐학한 자들에 대한 경계,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배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은 대부분 전봉준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봉준은 ‘인간존중’이라는 기본 정신 위에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봉준의 정신은 동학농민혁명을 관통하면서 상생 그리고 나눔과 배려라는 형태로 실현됐다.

 최근 서울 서초동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세 모녀의 어두운 단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한다면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실천한 상생, 그리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역사적 교훈이다.

 소인섭 기자
 이병규<농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