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봄날
황금의 봄날
  • 원용찬
  • 승인 2014.03.1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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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가 따뜻한 봄날에 과수원을 오르다 보니 거름을 뿌려 놓은 구수한 내음이 꽃향기보다 먼저 풍긴다. 아마도 유기농을 고집하는 어느 귀촌농민의 텃밭에서 나오는 냄새인 듯싶다. 나도 감나무 묘목을 작년에 심어놨고 올해는 일찌감치 밭에다 비료라도 뿌려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처지다.

푹 썩은 두엄냄새는 봄날의 농사짓기라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예부터 거름으로는 가축의 배설물이나 외양간에 깔아놓은 짚이 많이 쓰였지만 뭐니 해도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제일로 친다. 중세 농경시대에 두엄으로 쓰일 똥은 누런 황금벌판을 예비하는 거름으로서 금 쪽 같은 대접을 받았다. 소 오줌과 말똥의 우수마발(牛?馬勃)은 물론 하다못해 개똥도 거름에 쓰이는 귀한 재료였다. 겨울에도 새벽같이 동네를 산보하면서 개똥을 주워왔던 어릴 적 습관 때문에 지금도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을 떤다는 어느 성공한 기업인의 에피소드도 남다르지 않다.

유럽의 중세시대에도 사정은 같다. 중세 영주에게 간혹 바치는 ‘한 통의 똥’은 농노에게 무거운 세금이기도 했다. 영주의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는 ‘암소의 똥과 그에 딸린 송아지 똥과 영주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봉급으로 받았다. 중세 농촌의 농업방식도 가축의 배설물과 축력을 더 얻기 위해 목초지를 늘려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경작지가 줄게 되는 딜레마가 질소동화작용을 일으키는 네잎 클로버와 콩 등의 사료작물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땅에 화학비료가 나오기 전에 거름과 똥은 우리들 삶의 먹거리와 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예전에 친구가 보내준 오용기 시인의『아나, 똥』이라는 시집을 다시 꺼낸다. 욕쟁이 할머니가 질박하게 풀어 놓은 듯한 사설(辭說)이 구수하다.

“땅이 많이 물러졌어/나무고 풀이고 간에/손대면 물크덩하니 함부로 주저앉고 / 키 멀쑥하고 살만 풍덩풍덩한 요새 얘들처럼… 병기(病氣) 철철 흐르는 땅이 불쌍해서 못 보겠네 / 땅이란 것은 거름이 들어가야 푸근푸근해지는 거여 / 그래도 냄새는 똥 것이라야 살로 가는 것이여 / 농약, 비료가 하도 독하니까 무슨 병이 / 새로 생긴다고들 안 혀?

식민지 시대에 일제는 조선 재래의 벼 품종을 모두 없애고 수확량이 많은 왜종(倭種)으로 바꿔서 미곡증산을 강제했다. 내비다수성(耐肥多收性)의 특성을 갖고 있는 일본 벼 품종은 비료에도 잘 견디고 토지를 빨아먹는 힘도 강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거름이나 퇴비 가지고는 감당이 안 되었다. 1930년대부터 조선의 농토에는 일본 질소 공장의 화학비료가 엄청나게 깔리고 소작농은 비료 값을 대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농촌은 비료공장에서 생산된 화학비료 또는 돈을 주고 비료를 산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금비(金肥)로 뒤덮였다. 지주는 벼 수확량이 많아진데다 가을철이 되면 미리 소작인에게 꿔준 비료 값에 높은 이자를 붙여 수탈까지 하였으나 반대로 조선의 땅심[地力]은 점차 힘을 잃어 버렸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했던 전라도의 농토는 더욱 그랬다.

이제 화학비료로 대체된 똥은 서서히 토지와 분리되어 갈 곳을 잃어버렸다. 조선 농촌의 식민지 근대화는 ‘똥’과의 결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욕쟁이 할머니의 타령처럼 똥과 분리된 조선의 땅은 병치레로 신음하고 농약과 비료가 독해서 저항력이 강한 새로운 병충해도 생기게 되었다.

자연과 함께 생명력을 불어넣던 똥은 이제 생태계의 순환에서 벗어나 처치 곤란한 배설물로 전락하여 ‘더러운 것’이 되었다. 귀한 음식이라도 접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순간에 지저분한 것이 되듯이 똥도 생태계의 순환에서 벗어나게 되자 속되고 더러운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똥과 황금은 항상 같은 표상을 이룬다. 독일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언제나 은은하게 광채를 내며 남에게 항상 빛을 비추는 황금은 고귀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탐욕이 지나치게 달라붙으면 오히려 더럽고 천한 것이 되어버린다. 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똥을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순환 고리로 삼고 건강한 땅과 먹거리를 키워주는 자양분으로 삼을 경우에 그것은 귀한 황금과도 같다.

오늘도 논밭에 깔린 거름이 수확 철에 황금으로 주렁주렁 매달릴 생각을 하니 봄날의 산책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원용찬<전북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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