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헤어짐의 윤리
만남과 헤어짐의 윤리
  • 조미애
  • 승인 2014.03.04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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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겨울을 지낸 화분에서 꽃이 피었다. 어디에서 날아오는 향기인가 싶었는데 난초가 꽃을 피운 것이다. 실내에 두었지만 창밖 차가운 바람이 만만치 않아 몸을 움츠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 반가움에 잠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에 피어나 우리를 놀라게 했던 철쭉꽃이 생각났다. 건조하고 메마른 화분에서 긴 가지 하나가 늘어지듯 하늘거렸는데 어느 날 아침에 붉은 꽃 한 송이를 피워냈던 것이다. 발길을 옮겨 철쭉에게로 가 보았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시들어버린 것일까? 설마 누군가의 부잡한 손에 꺾여버린 것은 아니겠지! 새로 피어나 깊은 향기로 기쁨이 되기도 하고 시들거나 사라져 한때는 내게 즐거움이었던 것들이 까마득하게 잊히기도 한다. 이 또한 하나의 만남이려니 싶다. 많은 것들과 새로 만나는 것처럼 많은 일들과도 새롭게 만나고 일이 끝나면서 이별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살고 있다. 스치는 바람처럼 그렇게 가볍게 만나 차 한 잔의 나눔으로 끝나기도 하고 심장이 멈추듯 타오르는 불꽃으로 만나 숙명이 되어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자가 되기도 한다. 가족만큼 소중하고 은혜로운 만남이 또 있으랴. 하얀 종이위에 컴퍼스로 그려낸 둥근 원안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때로는 환하게 빛나는 아침햇살처럼 부서지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원 안이 답답하여 서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과는 단 며칠을 함께하였을 뿐이지만 헤어질 때면 아쉬움에 몇 번이고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누고 등을 토닥이면서 부디 건강하고 잘 지내라고 언제든 한번 놀러오라고 당부하면서 발길을 돌리다가도 다시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어 웃으면서 어서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직장 동료로서 만나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함께하다가는 인사발령으로 헤어지게 되면 서로 잘 가라고 잘 있으라고 부디 평안하시라고 여러 차례 안부를 당부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며칠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전북 진안에 사는 91세의 이효국 할아버지께서 북쪽에 두고 온 남동생의 혈육인 50대의 두 조카를 만났다. 북한에 살고 있던 남동생들은 이승에 없지만 동생이 남긴 조카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기뻐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당신이 죽기 전에 통일이 되어야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 볼 수 있을 텐데 몸이 여의치 않아 안타깝다는 말에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70여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심경이 어떠했을까 싶다. 중년을 넘긴 조카들의 모습에서 어릴 적 헤어졌던 어머니의 모습을 찾으면서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을 것이다.

가족과 생이별한지 반백년을 훌쩍 넘겨 이제 한 세기를 향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남북분단으로 생긴 이산가족들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령자가 많아 상봉이 허락된다 해도 건강이 걱정이다.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충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벌써 부모와 자식의 만남은 줄어 이번에는 1팀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그리웠던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평생 기다리던 사람들의 간절함을 언제쯤이나 해결할 수 있을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이 자유롭게 연락하고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내 생에 단 한 번’의 사랑을 노래했던 사람과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게 주어진 오늘 이 순간들을 더욱 사랑할 일이다. 봄이 되어 한결 부드럽고 촉촉해진 흙 위에 자란 풀들과 한 촉의 여린 꽃대를 소중하게 바라보면서 비록 어느 날에는 그들과 다시 헤어지게 된 다해도 함께하는 동안은 더욱 사랑하고 오래오래 바라볼 일이다. …

조미애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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