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비극과 희극을 가로지른다
삶은 비극과 희극을 가로지른다
  • 임규정
  • 승인 2014.02.25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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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에는 눈이 별로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창으로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풍경이 출근길에는 애물단지가 되는 것을 느끼며, 문득 찰리 채플린이 정곡을 찔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신발에 묻은 눈을 툭툭 털고 들어와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를 틀었다. 눈이 오는 날, 설원에서 펼쳐지는 채플린의 코미디를 한 편 정도는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황금광 시대>는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골짜기를 사람들이 일렬로 걸어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금광을 찾아 떼돈을 벌려는 이들로 이루어진 기묘한 행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작은 중절모를 머리에 얹고, 체구에 비해 큰 바지를 우스꽝스럽게 치켜 입은 채,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팔자걸음으로 부조리하게 걷는 사내, 찰리 채플린이 있다.

금광을 발견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길을 나섰건만 그의 앞길에는 고난만이 가득하다. 얼음 절벽을 건너 길을 잃고 눈보라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는데, 구세주 같던 이 오두막마저도 알고 보니 수배범의 은신처였다. 덩치가 크고 성격이 나쁜 빅 짐마저 눈보라에 떠밀려 오두막에 오면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이러저러하여 찰리는 그 오두막에서 벗어나 마을에 도착하고, 조지아라는 어여쁜 무희에게 반하건만 조지아는 찰리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렇게 고생스럽기도 쉽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찰리의 상황은 애처롭다. 물론 금광을 발견한 빅 짐과 함께 백만장자가 되어 조지아와 재회하게 되지만, 그것은 영화의 후반 약 5분에 지나지 않고, <황금광 시대>의 대부분은 찰리의 비참하고 고달픈 삶을 그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구가 왜소한 사내의 치열하고 애처로운 삶에 슬픔을 느끼기보다 눈보라를 피하겠다고 기껏 도망쳤더니 수배자를 만나고, 배가 고파 구두를 삶아 먹어야 하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찰리의 삶은 그보다 더한 비극이 없을 정도로 비극이건만, 관객에게는 오롯이 희극으로만 보이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찰리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 비참한 상황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있을 것이다. 눈보라를 만났을 때에도, 기껏 도망친 오두막에서 수배범과 마주쳤을 때에도, 조지아가 그를 좋아해주지 않을 때에도 찰리는 온 힘을 다해 살아나간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구두라도 삶아먹는 그를 보라. 찰리만큼 생에의 의지로 가득 빛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이 빛나는 의지로도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니, 얼마나 암담한가!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찰리의 삶이 비극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찰리가 생에의 의지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만약 찰리가 무기력하고 패배감에 젖은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삶은 비극은커녕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채플린이 말했다던,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은 사실 가까이서 볼 때 비극인 삶이야말로 멀리서 볼 때 희극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비극이 아닌 삶은, 멀리서 볼 때 진정으로 비극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찰리의 삶은 비극과 희극을 가로지르는, 생에의 의지로 충만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고되다. 많은 이들이 전북이 낙후되었다는 점에 안타까워하고 때로 좌절하며, 전북의 현실이 절망적이라고 한탄한다. 실제로 객관적인 지표들은 전북이 점점 뒤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을 비극적이라고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요, 동시에 우리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삶을 비극이라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흡족할 만큼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어디 그렇게 녹록하던가! 다만 우리는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할 것을 확신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현실에 순응하거나 주저앉는 것이 분명 더 쉬운 선택일 수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희극적인 순간을 위해 오랜 비극을 감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찰리에게 백만장자라는 꿈이 이루어졌듯,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분명 그의 비극적 삶이 희극으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무감감한 자에게는 삶이 비극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삶은 결국 멀리서 볼 때 비로소 비극이 된다. 가까이서 보아 비극인 삶이야말로 멀리서 볼 때 희극이 될 수 있는 셈이다. 가까이서 비극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 희망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비극이라 느끼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이 삶을 개선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만큼, 전라북도에 희망이 있다. 이제 곧 제6회 지방선거가 시행된다. 지방선거를 통해서 우리의 희망이 드디어 우리의 손에 잡히기를, 이 비극적 삶이 드디어 희극적 순간을 가져다주기를 고대해본다.

 임규정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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