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정신의 집”이다
말은 “정신의 집”이다
  • 김복현
  • 승인 2014.02.16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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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과 얼음의 스포츠 축제인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된 가운데 자랑스러운 ‘이상화’ 선수의 모습을 보면서 보고 즐기는 것 못지않게 더 중요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말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말이 있기에 세상이 돌아간다. 이러한 말과 기억의 유형(有形)이 글의 뿌리가 되었다. 인류는 글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말로써 모든 기억을 보존해왔다.

 기억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은 노력에 의해 문자가 태어나게 되며 문자는 인류의 기억을 유지하는 대혁신을 일으킨다. 문자가 태어난 이후 인류역사는 기억보다 문자에 의존하게 되며 대기록으로 남기는 역사를 남긴다. 반면 과학문명의 발달은 전자계산기를 만들어내면서 기억의 총아라고 하는 암산능력이 저하됨과 동시에 청소년들에게 숫자개념이 희박해지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억에 의지하던 시대를 마감하려는 것처럼 등장한 “네비게이션” 상용화로 인하여 지형지물에 대한 습득능력이 퇴화된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억에 의해 찾아갔던 길을 ‘네비’가 없으면 꼼작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다 “스마트 폰”은 인류의 모든 기본 생활 문화 풍토를 바꾸어 놓는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스마트 폰 하나면 기록문화도, 잊었던 기억도 모두 재생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과학 문명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세상이 된 듯하다.

 이처럼 발달된 과학문명의 시작도 말에서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통과 신뢰”라는 말도 역시 말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은 “정신의 집”이라고 했다. 말을 통해 개인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말은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이고 품성이며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소통의 거울이다. 그래서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살아나기도 하고 생명력을 갖기도 한다.

요즈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 한마디 실수로 인생을 망치는 그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말(언어)의 폭력이 극심하다. 욕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이다. 걱정이 되는 일면이다. 이와 함께 정치인들까지도 말을 함부로 하여 국민의 눈총을 받는 사례가 많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의식하고 미래지향적이며 국가발전의 기틀이 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본다.

짧은 상식으로 정치인답지 않은 말실수로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경우를 종종 접하고 있다. 감언이설, 흑색선전, 대중조작의 말이 생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의 홍수 속에 묻혀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심지어 역사적 사실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편리한데로 말하는 정치지도자가 설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특히 지난날 우리민족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일본은 사죄의 길을 걸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상대방의 고통은 조금도 배려치 않고 쓸어 담지 못할 치욕적인 말로 이웃나라 국민들과 세계인의 비웃음을 사고 있으며 망언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인류역사는 말의 가치와 생명력을 지켜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아베’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일본을 바라볼 때 같은 말인데 왜 저리 궁색한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답답하다. 말에 관한 속담을 떠올려보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는 말이 있다. 어쩌면 우리 속담이지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속담이기도 하다. 지금 독일에서는 ‘세계 1차 2차 대전’이라는 전쟁으로 고통을 당한 이웃나라에 찾아가 상처를 씻어주고 있다.

그리고 고통을 안겨준데 대하여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죄하고 있다. 반면에 똑같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아직도 뉘우침이 없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식으로 망언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말의 순리는 언제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깡그리 무시하고 공격적인 말로 위협을 하는 것이 최선인양 하고 있는 일본이 우리 이웃이라니 마음이 심히 아프다.

기억에 의해서가 아닌 기계문명 덕에 어제의 일들이 고스란히 기록되고 재생되는 현실이건만 상대의 고충은 조금치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좋으면 좋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다. 반민주적이라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질타를 하고 있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어서 한편 다행스럽게 생각도 된다. 이처럼 말이 타락된 세상이고 보니 ‘소통과 신뢰‘라는 말이 새삼 무거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소통과 신뢰라는 말이 판치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복현 / 익산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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