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충절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곳 장수!
애국충절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곳 장수!
  • 김종문 기자
  • 승인 2014.02.13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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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장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젊은 나이에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9월 3일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망 후 모녀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하다가 주달무가 논개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려하자 어머니와 외가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됐다.

5세가 되는 1578년 장수현감 최경회 심리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갈 곳이 없던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갔고, 논개는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하며 최경회의 부실이 됐다. 이후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평생을 함께 하려던 남편 최경회마저 순국하자 논개는 슬픔으로 날을 새우다 왜병들이 7월 7일을 기해 촉석루에서 승전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기생으로 가장, 잔치에 참석해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해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논개사당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길을 따라 가다보면 주논개를 기리는 논개사당(의암사, 지방기념물 제46호)을 만날 수 있다. 논개사당은 임진왜란때 순국한 주논개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은 장수현감 정주석이 주논개의 충절을 선양하고 장수 태생임을 기리기 위해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운 후 1955년 지역주민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남산에 사당을 건립,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경내에는 생장향수비명각과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이 차례로 있으며 장수군과 (사)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에서는 매년 음력 9월 3일 제례를 지내며 문화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논개사당 영정각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면 의암호가 한눈에 펼쳐진다.

호수 주변으로 공원과 쉼터, 체육시설 등이 들어선 이곳은 예전부터 가벼운 운동을 즐기기 위해 지역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으며 최근엔 의암호 일대에 수변데크와 경관조명이 설치돼 건강한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의암송

1500년대 후반에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가 주논개와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의암송은 천연기념물 제397호로 지정돼 있다.

장수군청 앞에 심겨져 있는 이 소나무는 수고 10m, 흉고 직경 5m의 노거수로 수령이 약 400년쯤되며 그 자태가 아름답다. 소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원줄기가 왼쪽으로 꼬여 수평을 이루고 있다.

주변 볼거리

▲장수향교

6백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년) 장수읍 선창리에 건립되었던 것을 35년 후인 세종 23년(1441년)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현재까지 창건 당시의 건물 양식대로 보존되고 있는 장수향교는 건물의 구조가 다포형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니만큼 이곳엔 우리 선조들의 얼이 담긴 이야기가 담겨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인 왜군이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하자 향교지기 정경손은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며 목숨을 걸고 항거했고 이에 감복한 왜군이 오히려 ‘이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라는 신표를 써주어 장수향교를 지금껏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장수=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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