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큰 별, 살아있는 정의 가인 김병로 선생
나라의 큰 별, 살아있는 정의 가인 김병로 선생
  • 조금숙
  • 승인 2014.02.11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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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 김병로 서세 50주기 추모행사가 甲午年 정월에 대법원에서 열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어두운 시절 민족을 위한 헌신으로 국민적 존경을 받아온 가인 선생이 계셨기에 해방 후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국가 현실 속에서도 우리나라 사법부가 굳건히 설 수 있었고 아직 재판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건국 초기에 사법부 독립의 전통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도 가인의 업적이었습니다.

사법부의 초석이자 나라의 큰 어른이신 가인 김병로 선생께서는 우리 고장 순창에서 1886년 음력 12월5일에 사관원 간관 상희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15세에 간제 전우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국치 이후 2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30세에 귀국하여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법학전문과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들었으나 민족의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마침내 사회투쟁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59세에 해방을 만나게 되고 69세에 법질서확립에 큰 공로를 세워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 76세에는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건국공로훈장 향년 78세로 1964년 정월에 별세하셨으니 올해를 기준으로 서세 50년이 되었습니다. 가인 선생께서는 독립운동가 이자 교육자 법률가와 사법행정가 정치인 등 가인 선생이 걸어온 발자취는 우리 근·현대사 명암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가인 선생께서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투사들을 변호하고 해방 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 법질서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사법권 독립을 수호했고 절제되고 청빈한 삶으로 모든 법관과 공직자의 귀감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법조인들은 하나같이 가인 선생을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대한민국 사법부 초석’‘한국 사법부의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대법원과 광복회에서는 가인 선생의 항일민족변호사로서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해보는 독립운동가 가인의 학술심포지엄도 함께 구상하고 있습니다. 가인 선생은 평생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신 가인의 사상을 사법부 구성원, 법률 종사자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명명하신 가인(街人)이라는 아호처럼 일생을 낮은 곳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친 가인 선생의 생애는 이 시대의 모든 법조인과 고위 공직자가 나아갈 바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반세기의 세월! 수많은 기억과 기록들에 먼지만 수북하게 쌓이고 지인들도 모두 별세하고 망각의 흐름은 강물처럼 흘러만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각되어오는 그런 인물이 우리 전북 출신 중에 있다는 사실은 이를 역사적 인물이라 부를 수 있다는 전북인의 자긍심이 애향 전북인으로 이어질 것을 도민들은 가슴속에 담아 둡니다.

그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가인 선생은 무엇으로 기억될까요? 단지‘초대’이어서가 아닙니다. 반민특위재판장 등의 최고 중책을 역임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일제하 법조인 그리고 민족지도자로서의 경력이 있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지요. 가인이 변호사로 활약할 때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를 변론하는 항일민족변론은 변호사활동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허헌, 이인과 함께 그를 3인의 민족변호사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주요한 항일민족사건은 거의 이들 3인의 손을 거쳐 치열한 법정투쟁이 있었고 가인은 항일변론의 폭을 넓혀가며 좌와 우를 포용하는 등 민족통합전선에 중심적 역할을 했기에 일제하에서 가인은 정직처분을 받기도 ?습니다. 이렇듯 가인 선생은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 몇 십 년간 굴곡 많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오점이나 꿀림 없이 떳떳한 생을 살아온 분입니다.

일제하에서 가인은 20년에 걸친 항일변론 법전문가로서의 역량 민족지도자로서의 지세 변절 없는 자세는 해방 후 친일청산의 압력이 드센 분위기에서 우리 사법부에 하나의 방어막으로 작용했으니 친일파 숙정 친일요소의 제거 그리고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가인의 노력은 일제하 법률가 법조인으로서 연마하고 고뇌한 부분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가인의 법 전문가로서의 내재적 이해와 민족운동가로서의 외재적 이해를 통합적으로 구사해야만 가인의 온전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법조인들은 말합니다. 법은 중립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 개개인은 새로운 세상을 앞당기기엔 힘이 부칩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가인이 변절하여 일제에 협조하였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인의 삶은 조선의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가인은 難進易退(어렵게 나가고 쉽게 물러난다.)를 좌우명으로 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처음 법률가가 되려고 결심했을 때도, 그리고 은퇴를 했을 때 모두 이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항일변호사로서의 자기의식 “원래 내가 얻기 위한 것은 재산을 축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라는 가인의 저서에 남긴 말에서 그는 약자에게 인권 옹호, 사회정의를 위한 삶을 일관되게 살아오면서 그 동기의 진정성을 실현했던 것입니다.

 조금숙<광복회 전라북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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