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군 승전과 전주성 점령
동학혁명군 승전과 전주성 점령
  • 소인섭 기자
  • 승인 2014.01.23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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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3

 ▲ 백산대기포

  백산에 도착한 동학민중들은 동학의 시천주 주문을 외우며 칼노래와 칼춤으로 정신적 무장을 하였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할 손에는 대신 필살의 무기인 죽창이 쥐어있었다. 이미 백산에 모인 동학민중들은 대규모의 연합성격을 띈다. 미리 연락을 받고 온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 주요 동학지도부의 농민군들과 3월 24일경 고부군 백산에서 합류하고 드디어 동학농민연합군을 본격 결성하게 된다. 이곳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들은 정읍, 고창, 무장, 흥덕, 태인, 김제, 금구, 원평 등 8천여명이나 되었다.

  동학농민연합군은 3월 25일 백산에서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손화중을 총관령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희옥.정백현을 비서로 확정하고 지휘체계와 조직을 갖추는 한편, 격문과 4대강령, 12개조 군율을 발표하였다. 격문은,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뜻이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다.”라고 시작하는 격문이 발표되었다. 고부의 사발통문과 무장의 포고문에 이어 백산의 격문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출사표와 같은 것이다. 또한 4대강령과 12개조 군율은 혁명의 대의명분을 세우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관군과 외세에 전쟁을 선포하는 동학혁명군의 길고 긴 출정식이었다. 한편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진산에서도 동학농민군 1천여명이 3월 12일부터 움직이기 시작하여 3월 23일 본격 혁명의 대열에 나선다. 진산 서장옥의 동학군이 전봉준과 합류를 시도했다는 것, 전라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합류한 것은 이미 백산대기포를 중심으로 사전에 약속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토현 대승

  동학농민연합군은 3월 26일 백산을 출발하여 곧바로 전주의 전라감영으로 가기위해 29일에 태인 관아를 점령하였고, 4월 1일 김제원평으로 출진하였다. 이에 전라감사 김문현은 황급히 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그리고 2일에는 서문 밖 용머리고개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고부 정읍 부안에서 전주로 오는 길목인 원평 청도리 앞길과 금구의 큰 길을 지키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원평에 주둔하면서 전주성을 노렸으나, 철통같은 관군의 전략과 또한 관군 1만여명이 내려온다는 정보에, 혁명군은 관군을 유인하는 전술로 바뀐다. 혁명군은 4월 3일 부대를 3대로 나누어 부안, 태인, 원평으로 이동, 잔류하여 관군을 혼란시켰다. 4월 4일 원평에 있던 혁명군은 부안에 있는 혁명군과 합세하여 부안을 점령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중심으로 관군을 유인 섬멸하는 병법을 구사하게 된다. 부안을 점령한 혁명군은 4월 5일 성황산에서 고부 천태산을 넘어 4월 6일 도교산에 진을 친다. 태인에 머물둔 김개남부대도 도교산으로 이동하여 전봉준 손화중부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전주의 길목을 지키던 관군도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며 4월 6일 황토재아래 진을 치고 머문다. 이때 동학군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혁명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만 다닌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야영을 하던 관군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동학군이 관군을 7일 도교산으로 유인하여 협공의 전략으로 관군을 대파하였다는 것과, 또 동학군이 황토재에 진을 친 관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동학농민군은 병법인 책략까지 사용하여 최초의 관군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와 반대로 관군은 완전 참패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고 조선정부에 큰 타격을 입힌 꼴이 되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큰 의미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동학혁명군은 전라도 전역에 세력을 확산하게 되었고, 또한 전국의 동학세력에게도 큰 영향을 준 쾌거였던 것이다.


 

 

 

 

 

 

 

 

 

▲황룡촌 전투와 전주성 점령

  동학혁명군은 황토재 승리의 결과로 자신감과 사기가 드높았다. 혁명군은 파죽지세로 7일 정읍, 고부로 이동하여 흥덕, 고창을 점령하고 9일에는 무장을 점령하였다. 12일에는 영광, 16일에 함평을 점령하고 21일에 장성에 도착한다. 장성에는 고부에서 출발한 동학군과 전라좌도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여 그 숫자가 수만명에 이르렀다. 혁명군은 가는 곳마다 탐관오리와 아전들을 처벌하였고, 백성들을 보호했으며 군율에 의한 질서를 지켰고 당당하게 환영을 받으며 그 세력을 더욱 넓혀갔다. 이에 정부에서 파견한 홍계훈의 경군은 15일에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바로 전봉준 대장과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노린 책략에 관군이 걸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4월 23일 동학군의 유인책에 경군의 선발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대나무 닭장)전법을 이용하여 많은 성과를 낸다. 조선정부의 정예부대인 경군은 이내 영광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까치골 능선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경군 대관 이학승과 많은 군사가 사상자를 내며 동학군에 의해 패하고 만다.

  혁명군은 황롱촌 전투에 승리하고,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홍계훈의 경군보다 빠르게 전주로 북상하게 된다. 2~3만의 동학농민연합군은 26일에 전주 삼천에 진격하여 하룻밤을 머물며 전라감사 김문현과 심리전을 벌이며 대치한다. 27일 장날을 기해 서문 밖 장터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혁명군은 대포를 쏘아 기선을 제압하고 허공에 쏜 수천발의 총소리에 시장판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에 놀란 수많은 장꾼들이 물밀듯 서문과 남문으로 휩쓸려 들어가자 그 틈새에 끼어 혁명군은 함성과 함께 총을 위협적으로 쏘면서 순식간에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전봉준 대장은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같이 혁명군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전주성을 무혈점령하게 된다. 조선왕조 발상지이자 전라도수부의 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장악하게 된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승전이자 조선왕조에 대한 전면 도전을 상징하게 되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이윤영/동학혁명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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