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질투하는 아이, 표현하게 하라.
139. 질투하는 아이, 표현하게 하라.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4.01.21 15: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귀여운 두 아이가 태어났다.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이 살인 사건의 전말이 구약성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밖에도 구약성서에는 형제였던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하자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야곱의 이야기, 자신들의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 형제들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질투의 근원은 무엇인가?

부모 중 한사람이 누군가를 편애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질투는 부모와 아이 사이에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질투는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의 질투를 무조건 나쁘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잔혹한 면이 있다.

질투심을 억제하기만 하면 열등감으로 발전한다. 반복되는 열등감은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어 결국 자기를 부정하게 되고 심한 정신 결함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들의 질투를 무조건 억제하기보다는 최소화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가령, 동생이 태어난 날. “엄마가 널 너무 사랑해서 너와 같이 놀아 줄 동생을 낳아주기로 했단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아이에게는 정직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설득력도 없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어느 날 남편이 “여보,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과 함께 지낼 여자를 데리고 오려고 해. 이제 쓸쓸하게 지내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을 때 어떤 마음이 생기겠는가? 물론 질투심이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나누어 받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듯 아이도 부모의 사랑을 나누어 받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아이에게는 동생이 엄마의 사랑을 빼앗아 가는 침입자일 뿐이다. 동생에게 엄마의 젖과 무릎을 빼앗긴 셈이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지위를 새 아기에게 빼앗길 처지인데 엄마의 말을 그대로 수용할 리가 없다. 따라서 ‘널 사랑해서’ ‘너와 놀아 줄’과 같은 표현보다는 차라리 “우리 집에 새 아기가 태어 날거야.”라고 하는 편이 좋다.

동생이 태어나는 일에 대하여 부모가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격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따라서 부모는 다음과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

“동생이 있으면 좋을 때도 많지만 귀찮을 때도 있을 거야. 울면 시끄럽고 아무 곳에나 오줌을 싸기도 하겠지. 엄마가 아기를 씻겨줄 때는 너 혼자서 있어야 하고 동생에게 젖을 먹일 때는 아마 네가 따돌림 받는다는 생각을 할지도 몰라. 질투가 날거야. 엄마는 동생만 사랑하고 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런 생각이 들면 엄마한테 와서 얼른 말해. 그러면 엄마가 그동안 주지 못한 사랑을 줄 테니까.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엄마가 동생을 안고 있어도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이해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렇게 말하는 걸 망설인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잘못된 마음을 심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는 갈수록 시무룩해지고 마음의 상처는 커져 열등감으로 발전한다. 차라리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에도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