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소통
경계와 소통
  • 유병하
  • 승인 2014.01.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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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분별심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남보다 더 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내가 마음속에 장벽을 쌓고 구분해서 보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나에게 어떤 해악(害惡)을 끼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먼저 사람을 구분하는 ‘경계’를 설정하고, 그 단단한 벽을 쉽게 허물지 못하고 있다. 믿는 사람과 못 믿는 사람,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전망이 밝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박물관에 근무하는 공무원으로서 하나의 우리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구분해서 활용하다보니 생긴 버릇일 것이다. 게다가 이런 분별심 위에 개인적인 성향까지 더하여 미운 사람과 좋은 사람까지 구분해 놓고 말았다. 속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운 사람은 얼굴을 보아서 괴롭고, 좋은 사람은 더 좋아질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하니 까닭 없이 바쁘기만 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고고학에 대한 선입견도 가지고 있다. 최근 국립전주박물관이 화두(話頭)로 삼고 있는 고대의 해양제사유적(海洋祭祀遺蹟) 조사나 익산 쌍릉(雙陵) 재조사, 여러 후백제(後百濟) 유적의 발굴과 재해석, 부안 청자가마의 발굴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지금까지의 문헌조사나 미술사적 연구방법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후백제의 실체는 고고학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즉 고고학 이외의 학문 분야에 대한 불신이 마음속에 깔려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 지상주의라고 할 만한 맹목적인 믿음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렇다 보니 ‘고고학을 전공한 관장이 부임하니 앞으로 발굴만 하게 생겼다’는 직원들의 핀잔을 듣게 생겼다. 그리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고고학과 다른 분야의 학문을 구분해 놓고, 역사학자나 민속학자, 미술사학자의 얼굴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도 마음의 경계를 다시 한 번 살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주말에 시간도 많고 해서 처음으로 서화(書畵) 전람회에 다녀왔는데, 관람하면서 내내 불편한 마음이 느껴졌다.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박물관에서 늘 보았던 작품과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란한 색채, 번짐과 같은 독특한 기법의 활용, 추상적 구도 등을 들 수 있다. 서화를 담은 종이 역시 내가 알던 것과는 차이가 많았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알던 것과 아닌 것, 즉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어느 덧 전통적인 것만을 최고(最高)로 여기는, 아니면 정통(正統)으로 추구하는 분별심이 생겼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비단 서화만이 아니라 현대의 청자나 백자 도예품도 간혹 불편하게 느낀 적이 많았는데, 마찬가지 이유에서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속에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우뚝 서 있으니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도 현대인의 작품을 불편하게 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반쪽짜리 현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옛날 것밖에 몰라’라는 아내의 핀잔에도 항변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의 경계는 오랫동안 박물관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생겨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마음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이 계속 불편하게 살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경계를 헐어버리고 ‘주변 사람과도 잘 소통하고, 다른 분야의 학문을 이해하면서 그 분야의 연구자와도 소통하며, 심지어 내 마음 속의 전통과 현대와도 소통할 것인가.

스스로 내린 답은 다음과 같다. 우선 먼저 마음에 경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서화 전람회가 계기가 되어 위에서 언급한 여러 경계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경계 건너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이외의 사람과 학문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창작의 세계를 말이다. 그것이 잘 안된다면 나와 다른 사람, 고고학과 다른 학문, 전통과 현대의 존재 이유나 목적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될 것 같다.

예컨대 사람은 모두 타당한 존재 이유가 있고,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에 나와 아주 짧은 시간을 다른 많은 사람들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이라고 느끼면 될 일이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고고학, 미술사학(美術史學), 문헌사학(文獻史學), 역사민속학(歷史民俗學)이라고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한국의 고대나 중세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서로 다른 접근방식일 뿐이다. 사실은 그러한 구분 자체도 근대 학문의 태동 이후에 생겼을 뿐이다. 전통과 현대와의 구분도 지금의 시점이 기준이 될 뿐, 또 다시 시간이 흐르면 그 구분은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즉 전통과 현대는 시간의 연속선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므로 현대 작품을 전통미(傳統美)나 가치의 발전적 계승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마지막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마음의 경계’를 ‘경계 사이의 소통’을 목적으로 굳은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허물어내야 할 것이다. 조금만 소홀하면 다시 높이 쌓여만 가는 경계심을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허물어 낸다면 어느 순간 자유로운 소통의 세계에 다가서 있지 않을까 한다. 특별히 새해는 갑오(甲午)의 해라고 한다. ‘새로운 변화’ 혹은 ‘기존 흐름의 거스름’의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하니 올해를 경계를 허물어내는 한 해로 삼고 싶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

유병하 <전주국립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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