常識으로 본 종교, 그리고 종교인
常識으로 본 종교, 그리고 종교인
  • 박기영
  • 승인 2013.12.03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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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하순 천주교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이 행한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가 설한 강론으로 춥디 추웠던 우리나라 정국은 뜨겁게 달구어 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계기와 내용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박 신부 덕분(?)으로 모처럼 만에 전라북도는 매일 매일 뉴스의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날마다 뉴스화되어 전달되어지는 박 신부 강론내용과 그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을 담 넘어 불구경하듯 아니면 투견장의 개 응원하듯 계 거품만을 물러대는 것은 최소한 상식인의 자세는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박 신부가 스스로 사제로서의 정도와 본분을 벗어나 파행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가 원래의 길로 돌아오도록 하여야 할 것이고, 또 행여 그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사제의 위치를 벗어나 잠시 파행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면 그가 겪고 있는 고통과 짐들을 우리 속인들이 넘겨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훌륭한 스승은 훌륭한 제자가 만들고 또 훌륭한 제자는 훌륭한 스승이 만든다는 상생적 관계를 상기하면서 말이다.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하고 많은 사상(事象)과 선인들의 행적을 보아왔고 또 그러한 사상과 행적에 관한 평가도 접해 왔다. 그리고 일례를 들어보면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 본질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가장 잘하는 정치’와 ‘가장 성공한 교육’이란 바로 상식으로 이해되고 또 긍정되어졌던 정치요 교육이었음을 간파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우리들의 실생활과 밀관되어 있는 종교와 더불어 교역(敎役) 그 자체를 본무로 하고 있는 종교인에 대한 접근과 이해 또한 ‘상식’이라는 시각과 논리에 의해 정답 도출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종교인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종교 생성 및 그 입문의 논거는 T.스펜서가 말한 바의 ‘죽음이 두려워서’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통상 모든 종교와 종교인들은 ‘죽음(현세)을 두려워하는’ 범인들에게 현세 이후의 내세(來世-영세, 부활, 왕생, 환생등)를 제시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치유시키려 하고 또 내세에 대한 약속(?)은 현세에서의 선행(善行)에 의해 가능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하여 인간이 성취하여야 할 3대의 가치이자 덕목인 ‘진선미’중에서 ‘선’이란 가치의 실천은 바로 종교가 추적하는 지상목표로 해석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선행을 실천함으로써 내세가 약속된다는 입장에서는 동일하지만 선행의 실천과 내세의 약속방법 및 그 접근전략에 관해서는 종교와 종파에 따라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각개 종교ㆍ종파들은 그들만의 진솔성과 완벽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별적인 신앙원리(경전)와 행위덕목(계율)을 제시하고 또 실천과제를 약속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선행의 실천을 선도하고 조장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인 목사, 신부, 승려등과 같은 이른바 종교인 내지 교역자들을 상치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은 범인들(신도, 일반인)에 비해 경전에 대한 높은 이해와 계율의 실천 및 올바른 사고와 언행의 유지가 전제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본다면 기독교와 천주교는 ‘불쌍한 양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리고 불교의 경우는 ‘우매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일반 사회적 시각에서 본 그들의 성취목표이자 행위규범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와 규범을 실천하고 있는 종교인들의 행위 또한 실사회에서 범인들이 연출해 내고 있는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것들이 아니라 범속한 세인들은 감히 답습하거나 모방할 수도 없는 이른바 고답적이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것들이어야 함이 요청되고 있는 바다. 부모를 교살한 철천수 원수나 조국을 패망시킨 적군도 범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깊고 넓은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면서 말이다.

박기영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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