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생생한 역사를 살려내자
후백제의 생생한 역사를 살려내자
  • 유병하
  • 승인 2013.11.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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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전북지역에서는 후백제와 관련된 주목할 만한 학술적 성과가 있었는데, 바로 후백제(892~936)의 궁성(宮城) 흔적이 전주 시내에서 확인되었고, 진안 도통리에서는 후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청자(初期靑磁)의 흔적이 실물자료로 확인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두 군산대 곽장근 교수의 오랜 관심과 노력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견훤(甄萱, 867~936)이 ‘백제 부흥’의 기치 아래 900년 전주를 왕도(王都)로 삼고 건설했을 궁성의 위치에 대해서 일제강점기 이래 동고산성(東固山城), 전주감영, 물왕멀 일대를 궁성으로 추정하는 여러 설들이 난무할 정도로 논란이 있어왔다. 그런데 최근 곽교수는 전주시 중노송동 일대에서 후백제 궁성의 일부로 추정되는 인공적으로 축조한 성벽 50m와 자연지형을 활용한 나머지 성벽 흔적을 확인하였다.

그곳이 견훤과 더불어 후삼국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궁예(弓裔, ?~918)가 축조한 궁예도성(弓裔都城)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성벽을 쌓고 마름모꼴의 평면을 보인다는 점으로 볼 때, 후백제 궁성일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신뢰가 간다. 더군다나 견훤과 궁예가 도성을 만들고 이용했던 시간이 50년 정도에 불과해 기존에 존재하였던 토성을 활용하여 궁성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번 곽교수의 조사 신뢰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진안 도통리 청자 요지(窯址)는 사실 초기청자 가마로 이미 학계에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 곽교수의 발굴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는데 의의가 있다. 특히 이번 발굴에서 소위 ‘해무리굽 청자’와 함께 5m 이상 퇴적된 갑발(匣鉢)이 확인되어, 진안 도통리 가마가 양질(良質)의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여러 여건 때문에 가마의 구조 등은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만으로도 전북 청자의 역사를 새로 써야할 정도이다.

우선 그동안 청자 제작이 고창과 부안일대의 해안지방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여기는 일반의 상식을 깨게 되었다. 아울러 중국제 청자로 인식되어왔던 전주 동고산성, 익산 미륵사지, 남원 실상사 출토 해무리굽 청자가 도통리산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 역시 주목 할 만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도통리 청자요지의 가장 큰 의의는 후백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물류에 불리한 내륙에 대규모의 가마를 운영하였다는 것은 든든한 후원세력 즉 정치세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청자의 생산이 외국에서 유입된 고급기술을 바탕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용도 극히 제한된 고급물품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전북 내륙에 양질의 청자를 대규모로 생산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던 세력은 아무리 봐도 10세기 전반 전주를 왕도로 삼고 전북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후백제 밖에 없다.

이러한 성과만으로도 후백제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교수가 이룬 쾌거가 문헌조사와 현지조사, 좁은 범위의 시굴조사(試掘調査)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후백제 역사와 문화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밀하고 지속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첫째, 전주의 궁성과 도성체계(都城體系)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중노송동에서 새로 확인된 궁성의 성벽을 절개(切開)하고, 주변 학교 운동장에 대해서도 과학기기를 이용한 지중탐사(地中探査)를 실시하여야 한다. 아울러 건축공사나 도로공사 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후백제의 도로, 궁전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은 성과는 내·외성(內外城)과 동고산성을 연결하는 도성체계를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전북 일대에 산재해 있는 후백제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도 병행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진안 도통리 외에도 같은 시기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안 외궁리 청자 가마 역시 확인이 필요하고, 후백제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추정되는 완주 봉림사지의 조사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셋째, 후백제 도성인 전주와 후백제 관련 유적에 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기존 발굴조사 성과를 재평가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흔히 통일신라 말~고려 초로 비정해버린 익산 미륵사지, 익산 제석사지, 남원 실상사의 출토품, 탑의 축조(築造)와 사리봉안(舍利奉安) 시기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많은 왕궁리 오층석탑 등에 대해서도 후백제와의 관련성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후백제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대부분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때문에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후백제 전시실을 개설하고 싶어도 보여줄 만한 변변한 유물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주의 시민과 후백제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던 전북의 주민들은 실상 후백제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후백제는 그저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죽은 역사’였을 뿐이다. 이제 곽교수의 노력 덕분에 궁성도 답사하고, 박물관의 전시를 통해서 후백제의 각종 유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즉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도 있는 후백제의 ‘생생한 역사’를 접할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앞으로 후백제의 실체를 세밀하게 밝히고, 그 역사를 생생하게 살려내려는 우리의 노력만 남아 있을 뿐이다.

유병하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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