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 김종일
  • 승인 2013.11.1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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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뜯어봐도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나보다 우월한 유전자와 윤택한 배경을 타고난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세상이 가끔은 원망스럽다. 나의 선택과 노력에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세상의 많은 것들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팔자소관이라고 치부하고 살기에는 억울한 구석이 많다. 왜 세상은 이따위로 불공평하단 말인가? 내가 주인공인 세상은 왜 없을까? 누구라도 한 번쯤은 조물주의 고약한 심보에 분노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그저 보이는 것일 뿐,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아는 세상의 모습은 지극히 공평하다. 우리 누구나 어딘가에서 이미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잠시 우리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원자의 특성과 성질은 그 원자가 가지는 전자의 개수와 배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일단 기본적으로 모든 전자는 모든 점에서 완전히 똑같아 서로 전혀 구별할 수 없다. 사람으로 치자면 완전히 똑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도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라면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라도 달리할 수 있겠지만 알다시피 전자들은 그렇지도 못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전자들은 완전하게 같다. 따라서 모든 전자들은 일단 공평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이 전자들이 모여서 원자라는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가 있다 하자. 회사에는 사장도 있고 과장도 있고 경비도 있어야 하듯이, 어떤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면 조직의 구조에 따른 계급도 반드시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조직이 구성되면 계급이 생기고 필연적으로 이에 따른 불평등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모두 다 사장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원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자들이 모여 원자라는 조직을 만들 때 모든 전자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규칙에 따른다. 하나의 자리에 절대로 두 개의 전자가 같이 있을 수 없다. 한 자리에는 오로지 하나의 전자만 있을 수 있다. 이것을 파울리의 배타율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갑수와 철수라는 두 전자가 모여 원자라는 회사를 만든다고 해보자. 먼저 갑수와 철수는 완전한 일란성 쌍둥이여서 이름만 다를 뿐 어떤 방법으로도 전혀 이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심지어 이름을 서로 바꾸어 불러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 이 회사에는 사장과 과장이라는 두 개의 자리가 있는데, 한 자리에 한 사람만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갑수가 사장을 그리고 철수가 과장하거나, 철수가 사장 그리고 갑수가 과장을 맡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겠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누가 어떤 자리에 앉는 것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완전히 똑같은 갑수와 철수라는 전자가 사람처럼 자아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둘 중에 누가 사장이든 세상에 드러내는 이 원자라는 회사의 모습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자연은 누가 사장인지 과장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한다. 물리학에서 이 회사는 갑수가 사장이고 철수가 과장일 확률 50% 그리고 철수가 사장이고 갑수가 과장일 확률 50%인 상태로 표현한다. 비록 겉보기에는 똑같지만 두 상태는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두 상태가 반반의 확률로 항시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만약 이 두 상태가 같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측정치와 다른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된다. 하지만, 두 상태는 절대로 서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갑수가 사장인 세상과 철수가 사장인 세상이 항시 공존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서로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리적으로 말하면 이 두 세상은 비록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비록 어느 한 세상에서 철수가 과장이지만, 철수가 사장인 세상도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이다. 세상은 이렇게 공평하다.

 만약 양자역학 기초가 되는 이와 같은 이론을 현실 세계에 그대로 유추해본다면, 비록 현재의 내 위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내가 꿈꾸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그 세상도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을 다원우주론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차원 속에 무한히 많은 우주가 공존한다는 이론이다. 만약 미시세계에서와 같은 공평의 개념을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그 세상은 어딘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전자와 같이 서로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개체로 이루어진 조직의 경우에도 그러할진대, 사람처럼 확실히 서로 다른 개체들로 구성된 세상을 자연이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다원우주론이 비록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단점이다. 안타깝게도 가끔 SF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차원 사이를 이동하는 게이트 같은 것은 현재의 물리이론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주인공인 세상이 어딘가 있다손 치더라도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을 벗어나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없다. 아직은 갈 수 없는 나라이다.

 김종일<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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