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을은 황금 빛깔로 출렁이나?
왜 가을은 황금 빛깔로 출렁이나?
  • 원용찬
  • 승인 2013.10.24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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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근교 밭에다 고종시 감나무 묘목을 심어 놓고는 띄엄띄엄 굽어다 봤더니 잡초만 도로 키운 꼴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 제초제도 뿌리고 검은 비닐도 깔았지만 바랭이, 돼지풀, 까마중, 쇠비름 등 하여튼 온갖 잡초를 이겨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곧이어 찬 서리가 내리면 잡초도 풀씨를 내뿜고 한풀 죽을 터이니 내년 봄에는 밭을 한번 엎어서 제대로 감나무 밭의 모양새를 갖춰야겠다는 요량이지만 별로 자신은 없다. 하긴 잡초라고 명명된 풀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하지 못해서 불리는 이름이지 사실은 저마다 생명을 갖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들이다. 뽑힐수록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 어린 감나무 묘목을 둘러싸고 오들오들 떨게까지 만드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생각은 다른 데로 미친다.

프랑스 철학자 바타이유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공짜로 풍요와 발전을 제공하는 태양 에너지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뭔가 결핍되어 있고 자원이 부족하다고 여기지만 지구 생명체 전체적으로 볼 때, 태양이 베푸는 풍요와 잉여가 항상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타이유의 입장이다. 우리 몸이 적정한 운동을 통해 과잉상태의 영양분(바타이유의 책 제목대로 ‘저주의 몫’)을 적절히 배출해야 하듯이 인류 역사도 잉여 축적분을 어떻게 소모하느냐에 따라 위기극복의 양상도 달라져왔다고 한다. 전쟁은 과잉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가장 비극적인 소모 방식이었다. 결론적으로 증여와 기부를 통한 사회적 잉여분의 소모가 최고라는 것이 바타이유의 숨은 뜻이라 하겠다.

넝쿨째 밭 전체를 휘어 감고 있는 잡초도 태양에너지가 가져다 준 풍요와 과잉이다. 넘치는 잡초 풀을 뽑아서 두엄자리를 만들어 거름을 밭에 뿌려주는 것도 현명한 과잉처리 방법이지 않을까. 그러기에는 인간의 노고가 너무나 엄청나다.

이번 경제사상사 수업시간에 중농주의를 대학원생과 함께 공부하는데 잡초의 경험 때문인지 자연과 잉여의 문제가 새삼 다른 각도로 다가 왔다. 우선 수업 도입부에서 학생들한테 가을 들판의 노란 벼이삭을 연상하고 그런 감성으로 주제를 접근해보자고 제안했다.

중농주의는 농업만이 순생산물(net product)의 가치를 창출한다고 본다. 상공업은 유통차익이나 농업이 생산해낸 재료를 가지고 가공하고 변형하는 산업부문으로 비생산적이라고 단정한다. 더구나 공업은 책상 하나를 만든다고 통나무를 깎아 내어 대량의 폐기물을 발생시키고 가공 후에는 완성품의 양도 그 만큼 줄어든다고 극단적으로 비난 해댄다. 중농주의자의 대표격인 프랑스 경제학자 케네는 농업의 순생산물은 토지의 은혜이며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이라고 밝힌다. 물론 중농주의 경제사상은 오늘날에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어쨌든 자연의 풍요로운 선물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바타이유의 사유와 마주친다.

다시 학생들과 외국논문 한 편을 골라서 함께 읽었다. 문득 기가 막힌 대목에 눈길이 닿자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어째서 들녘의 가을 벼이삭을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는가? 왜 은행나무 잎은 노란한가?”

학생들은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그러고는 논문에서 인용된 중농주의자의 발언 한 구절을 꼼꼼히 읽어 주었다. “농업이라는 것은 쉼 없이 하늘과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이며 끊임없는 창조행위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거뒀다고 생각하는 농업의 순생산물도 알고 보면 토양에 빚진 것이며, 신의 섭리와 창조주의 은총에 힘 입은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후드득 빗방울을 떨어뜨려 땅을 ‘황금’으로 바꿔주는 창조주에게 빚을 지고 있다.”

창조주가 자신의 섭리와 자연스러운 경로를 통해서 가을에 땅을 황금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중농주의 학자들의 생각을 통해 왜 가을이 황금빛을 띠고 있는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또 하나를 덧붙일게 있다. 바로 농부의 끊임없는 노고와 땀방울이 토양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대지는 그대로 황무지의 자갈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으리라. 노란 은행잎이라고 예외일까.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나무 아래 떨어져 썩고 부식되어 다시 내년 봄날의 푸른 잎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계절적 순환도 창조주의 섭리라고 하겠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이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도 광채 속에서도 은은하기 때문 아닌가. 금은 이렇듯 언제나 조용히 베풀기만 하는 것이다. 베푸는 자의 눈길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오늘도 쌀쌀한 가을 아침에 끝없이 펼쳐진 들녘을 바라보며 잉여로 베풀어 주는 대자연의 선물과, 땅 위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수고로움이 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지를 되새긴다.

원용찬 <전북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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