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선전, 언어놀이
정치와 선전, 언어놀이
  • 권영후
  • 승인 2013.10.2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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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정치권은 경제민주화ㆍNLL 논쟁,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기초연금 도입’ 공약 이행 여부,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 심리전 요원의 대선 개입 논란, 통합진보당의 종북주의, 4대강 부실공사, 밀양 송전탑 건설,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담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가는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국민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며, 불가능한 사안도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담론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치와 언어는 숙명적으로 상호 공존의 관계에서 담론을 만들어 간다. 정치가들이 사람들의 태도와 의견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면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기법은 물론이고 언어의 의미, 기능, 활용방법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언어는 정치적 소통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요체는 사람들과 정보를 쌍방향으로 주고받고, 공유하며, 공감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설득과 쌍방향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노골적이고 은밀하게 인간의 신념과 행태에 영향을 미치고 조종하려는 선전(프로파간다)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은 선전을 “정치적 상징을 통한 여론조작, 또는 의미 있는 상징의 조작에 의한 집단적 태도의 관리”라고 정의했다. 선전은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중요 수단으로써 정치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직 선거와 정책에 관련된 논쟁에서 선전전은 격렬하다.

선전은 스핀닥터, 전달매체, 메시지, 의제설정과 프레임 형성, 선전기법으로 구성된다. 정치선전에서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활동에 능한 선전전문가인 ‘스핀 닥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선전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버네이즈는 “군대가 병사들의 육체를 통제 조종하듯 선전으로 여론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독일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가 돼야 한다. 거짓말은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선전의 출발점은 정치권이나 언론이 주도하는 의제설정(아젠다 셋팅)이다. 의제설정은 ‘대중이 어떤 이슈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세상 풍경을 그리게 한다. 의제설정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프레임이 형성된다. 한번 프레임이 형성되면 쉽게 깨지지 않는다. 언어를 반복사용하면 인간의 심리 저변에 무의식적으로 프레임이 고착되기 때문이다. 정치선전의 성패는 의제설정과 프레임 형성에 달려 있는 셈이다.

우리 정치권은 논쟁에서 타협과 공존보다는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기 때문에 ‘쌍방향 홍보’보다 부정적인 의미의 ‘일방향 선전’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다. 선전기법을 총동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대결은 정치언어를 오염시키기 일쑤다. 정부 여당, 야당, 시민단체의 의제 경쟁에 보수ㆍ진보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 개인미디어가 가세하여 프레임 쟁탈전을 벌인다. 한국사회의 담론공간은 보수진영에 유리한 기울어진 경기장이며, 보수세력의 ‘종북’프레임은 반대 이슈를 ‘블랙홀’ 처럼 집어삼키는 요술방망이다. 정부 여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수사과정에서 ‘대선불복’, NLL 포기논란에서 ‘사초실종’ 프레임을 들고나와 야당의 공세에 맞서고 있다.

좌파ㆍ반미ㆍ친기업ㆍ반기업 같은 ‘낙인찍기’, 국가안보ㆍ애국주의ㆍ자유민주주의 같은 ‘추상적 가치의 부각’, 4대강 살리기ㆍ원자력 발전ㆍ한국형 엠디 같은 ‘가면으로 치장한 완곡어법’ 등 말장난 수법으로 대중을 유혹한다. 이외에 많이 사용되는 선전기법으로 경제위기를 강조하며 경제민주화ㆍ복지ㆍ핵발전 축소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공포감 조성’과 ‘책임 떠넘기기’, 취사선택과 왜곡‘, ‘애매모호한 표현’, ‘역사적 기억의 조작’, ‘아니면 말고식 꼬리 감추기’ 수법 등을 꼽을 수 있다.

정치와 선전은 불가분의 관계다. 선전에서 언어는 핵심요소로 작용한다. 정보 과잉의 대중미디어 시대에 수용자는 이성적 사고와 판단력 미비로 선전에 취약할 수 있다. 매일 공론장에서 제기되는 의제와 담론경쟁의 배경과 메시지, 선전논리와 기법, 수사적 언어, 프레임의 형성과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면 선전에 쉽게 넘어가기 십상이다. “선전을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조차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는 경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 언어의 숨은 의도와 이해관계를 정확히 밝혀낼 수 있다면 민주주의로 포장된 전체주의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권영후<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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