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모호해지는 학교의 기능
132. 모호해지는 학교의 기능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3.10.22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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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부터 원하는 학생들은 모두 오후 5시까지 학교가 맡아준다. 정부의 발표다. 맡아준다는 것이 교육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보육이다.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밤 10시까지도 맡아준다. 일하는 국민들을 배려한 정부의 방침이란다. 학교가 교육을 하는 곳이기 보다는 보육하는 곳으로 전락하는 느낌이 든다. 정치가 학교를 흔들어도 너무 흔들어 댄다. 비포장도로를 마구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이리 저리 흔들리고 급기야 멀미를 하게 되어 있다.

그동안 학교가 경쟁의 기능을 맡아 수행하다보니 공교육 붕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이제 설상가상으로 보육의 기능을 하다보면 미래 학교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염려스럽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내 놓는 중요한 교육정책이다 보니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내어 놓는 교육정책들이 학교를 건강한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보다는 정권연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학교가 혼란스럽다.

리버먼(Lieberman)은 그의 저서 ‘공교육부검’에서 교육은 이미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는 공교육을 시체 부검하듯이 해부하고 있다. 공교육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기능을 상실했으며 개혁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 생명 연장술의 범위를 이미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동의하기 어려운 이론이지만 새겨둘 필요는 있다.

교육의 위기가 평면적인 하나의 원인 때문은 아니다.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 해결책을 찾는데도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주체인 학생, 교원, 학부모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 공동체가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며 최적의 교육방법을 찾아내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동안 교육공동체들은 학교에서 성공의 환상을 보곤 했다. 이러한 환상이 때론 신기루가 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성공의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학교 구성원들은 상실과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정치가 교육을 흔들어댔기 때문이다. 최근 40년간 30번 이상 대학입시를 바꾼 것이 이를 말해준다. 제발 교육을 교육의 주체들에게 맡기는 정치권의 넓은 아량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계속 정치가 교육을 흔들어대면 학교는 불안감이 만연되어 어디로 달려야 할지 모른 채 맹목적인 질주를 할 공산이 크다.

지금 정부의 통치 논리에 의하면 어린이집은 밤12시까지 문을 열어야 하고 학교는 밤10시까지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좋다. 그렇다 치자. 아이들이 과연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밤늦게 까지 맡겨야 할 대상인가? 우리는 지금 ‘어린이집이나 학교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란 딜레마를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의 교육적인 배려가 아니라 부모가 더 일해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기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슬픔이다.

정부가 부모들이 돈을 더 내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해 주어야 함에도 교육의 질을 추구하기보다는 부모에게 돈은 더 벌라고 강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밤늦게 까지 아이들은 교육기관에 맡겨진 채 불안감, 공포, 우울증, 체념, 무기력과 같은 기제를 만나게 될 것이 뻔하다. 아이들이 힘들어지는데 돈은 더 벌어서 무엇에 쓰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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